(50강) 8:31-41 자유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많이 들었고 또 잘 아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많이 들은 말이며 잘 안다는 것이 뜻하지 않은 함정으로 작용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잘 알기 때문에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잘아는 말씀일수록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32절 말씀 역시 잘 안다고는 하지만 그 수준은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케 했다는 것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진리를 예수님으로 이해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이해가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이 말씀을 다만 예수님이 하신 일로만 받아들여 버린다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멈춰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입니다. 신자들이 대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부분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나 예수님으로 되어진 일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이 정작 신자들의 삶에는 전혀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을 말하되 복음의 능력은 없고 복음을 안다하되 그 삶에서는 복음을 찾아볼 수 없는 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32절의 말씀도 이런 면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로만 여기고 지나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면, 우리에게는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유케 하셨는데 정작 신자된 자들은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이것은 신자로서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리로 자유케 된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까? 자유하신다면 과연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진리로 자유케 되리라는 말씀을 '나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즉 복음이 신자로 하여금 무엇을 해도 죄가 안되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기 때문에 담배를 피워도 괜찮고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담배나 술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백성되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복음에 대한 큰 오해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무엇을 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예수님이 자유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는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필요하다면 결국 그들의 현재 상태는 종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유는 종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이미 자유케 된 자들에게는 필요치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뭔가 붙들린 종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이미 자유케 된 사람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자유란 의미없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한 반응을 보입니다.

33절에 보면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는 말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이미 자유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때문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대해서 위와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자유한 사람으로서 자유케 되리라는 말씀은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스스로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에게 '나를 믿으면 산다'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살아있는데 믿으면 산다고 할 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있으되 죽은 자임을 아는 자들에게만 믿으면 산다는 말씀이 깊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날때부터 아브라함 자손으로 태어났고 남의 종이 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자유케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이미 자유한 우리에게 어떻게 자유케 되리라는 말을 하느냐 네 말은 엉터리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다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육체가 누군가에 붙들린 종이라는 것이 아니라 죄에 붙들린 죄의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 역시 죄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종이란 무엇이고, 죄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죄의 종이란 죄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죄가 주인이기 때문에 죄의 지시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죄를 많이 범해서 죄의 종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의 종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죄가 보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때문에 자신들이 죄의 종으로 산다는 것도 전혀 생각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함으로써 나타난 것은 자신은 의로 여기고 간음한 여인은 죄인으로 여긴 것입니다. 즉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비교를 하기 때문에 간음이라는 행동을 하지 않은 자기들은 간음한 여인에 비해서 떳떳한 사람이고 그러므로 여인을 심판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결국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죄를 전혀 의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행동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행동으로서 자신과 남을 비교하게 되고 행동의 차이를 두고 의와 죄의 구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라는 것은 인간을 의로운 존재로 여기게 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비록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지만, 속마음에서 저 사람보다는 착하다는 생각이 자리함으로써 마치 자신은 이미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껏 받아서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이것이 죄이며 그러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종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보다는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무너질지언정 내가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다고 여길수록 당당해지고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정당하다고 생각될수록 자신이 고개를 숙이려는 생각은 멀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상대방 역시 나름대로 자신을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이 서로 자신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계속 충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면 전혀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가장 정당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당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당하신 분이 정당하지 못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정당치 못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고, 이러한 예수님을 굳게 세우고 보이는 자가 누구인가 하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그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상대방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린 대개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면 정당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네가 나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내가 옳은데 왜 고개를 숙여야 하느냐?'는 반발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세우기보다는 자신을 세우는 것이고 결국 그리스도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는 자가 스스로 예수님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서 비록 내가 정당하고 옳다 할지라도 먼저 고개를 숙이는 이것이 진리로 자유케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즉 자유는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제가 아닙니다.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진리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고, 때문에 진리에 의한 삶의 태도가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기 싫은 것을 믿음을 보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안 자로서,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알기 때문에 자신 역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세우고자 하는 죄에서 이미 자유를 얻은 것이고, 진리가 그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자유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는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우리의 속을 후련하게 하는 것은 내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 사람의 약점을 붙들어서 자신에게 꼼짝못하게 만들 때 가장 만족한 기분을 누리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것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기고자 했습니다. 자신들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잘못됨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자유가 필요한 죄의 종으로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기려고만 하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들에게 지는 자로 오시고, 굴복시키기보다는 굴복한 자로 오신 예수님이 자유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십니까? 그러면 진리대로 살아가십시오. 말씀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자유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에게서 그분의 삶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삶을 따라가십시오. 거기에 진리로 자유케 되는 비밀이 있습니다.

진리는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세웁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진리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스스로의 올무에 매이지 않고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