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강) 8:42-59 유대인과 말씀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만 그들 모두의 하나님이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하나님과 여러분이 생각하고 원하는 하나님도 다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다같은 하나님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다를 수가 있느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하나님을 끄집어 낼 때 하나님은 결코 동일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안에서 서로 만나고 교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충돌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본문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유대인들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르기를 꺼려하는 그러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이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정상적이고 제대로된 만남이었다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대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심각한 반발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민족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8장은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들어 예수님에게로 끌고 온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 법대로 해야 하느냐 아니면 당신의 말대로 해야 하느냐를 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당신의 말대로 죄에 대해서 용서해야 하느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법이냐 사랑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이처럼 8장은 예수님과 유대인의 전혀 다른 입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법의 하나님입니다. 율법을 주시고 율법대로 잘 실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법대로 실천하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실천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법 앞에서 인간의 허물과 죄를 가리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하나님에서부터 이미 어긋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46절에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지금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너희가 진리도 듣지 않고 진리를 말하는 나도 믿지 아니한다. 이것을 보니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말하는데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48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혈통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나 행동에 대한 적대감을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이며 모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말인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라는 말, 즉 '너는 귀신이 들렸다'는 말을 함께 함으로서 극에 달한 그들의 적대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대가 곧 하나님에 대한 적대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51절에도 보면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신자의 죽음을 죽음으로 말하지 않고 자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신자는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몸이 죽은 것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오게 된 것인데 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것을 뜻하는 것이지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의 죽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질 수 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이미 율법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진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로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율법을 지킴으로서 영생을 얻은 자신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한다'고 할 때 그것을 몸이 죽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명백히 모순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음을 제시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위대하다고 여기는 아브라함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다 죽었는데 예수님이 '내 말을 지키면 죽지 않는다'고 하니 결국 예수님 스스로 자신이 아브라함이 선지자들보다 더 큰 자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도 자신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였음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도 예수님이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유대인들을 더욱 기막히게 할 뿐이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는 질문에 대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58절)라고 답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극에 달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약 22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예수님의 답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쳐죽일 정도로 분노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예수님에게 대한 유대인들의 이러한 반응이 참으로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는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원하는 하늘의 표적을 보여주며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할 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그 말씀을 옹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을 2200년 전의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야말로 그들의 조상을 모욕하고 하나님도 모욕하는 귀신들린 자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대화는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쳐죽이려고 하고 예수님을 그들의 손을 피해서 성전에서 나가버리시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그들을 설득시키거나 자신에 대해 전혀 납득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 이 일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열심히 증거하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전혀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분노와 반발만 더 크게 가중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애당초 그들을 설득시키거나 납득시키기 위해서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유대인들과 같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언제나 예수님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내포되어 있는 고집과 완악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법을 주장하고 나온 유대인들은 사랑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방식에 대한 반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애당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 방식대로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법대로 해결하는 것이 옳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법에 대한 잘못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떳떳했습니다. 반면에 법에 어긋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징벌하는 것이 그들의 정의였던 것입니다. 법을 굳게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법이 아니라 사랑을 굳게 세우는 것이 곧 진리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죄인된 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고집과 완악함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밀쳐내 버리고 대신 내 고집을 세우고자 할 정도로 굳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린 때로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면서도 내세우는 것은 우리들의 고집임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대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지적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고집과 완악함으로 반응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왜 그들이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며 오늘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린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옳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신자됨이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옳다고 인정하는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실천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말씀을 굳게 세운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입장이나 고집이나 감정 기분 등을 세우기보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고 말씀이 원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곧 말씀을 세우는 것이고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내 감정과 기분이 용납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말씀보다는 내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순종되는 우리의 모습을 수시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집과 완악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안다고 해서 순순히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이 압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유대인과 같은 고집과 완악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우리의 것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 스스로 물리치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의하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이 어떠한가에 대해 무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돈을 사랑치 말라고 하셨으면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의 말은 맞지만 돈 없이 세상을 어떻게 삽니까?'라는 생각이 우리 속에 남아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고집과 완악함이 말씀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따져서 할 수 있는 것은 실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말씀을 이루려는 고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면 그 말씀이 우리가 살아가는 평생의 삶의 푯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깃발이 되고 푯대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말씀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의 허물과 실수가 보여지는 것이고 회개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우리의 감정과 고집이 앞선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생각은 용납하지만 나의 감정과 고집이 용납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말씀이 세워지기보다는 내 감정과 고집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죄가 어떻게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보다는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앞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내 감정과 모든 것이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알면서도 결국 자신의 감정과 기분대로 나아가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말씀을 물리치는 것이고 말씀보다 자신을 더욱 굳게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렸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 역시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가 주는 자유는 우리 몸의 자유가 아니라 마음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매어있는 마음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에게 매인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말씀이 옳음을 인정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자신의 감정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때,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감정에 충실해서 미워하는 쪽으로 나아갈 때 그는 죄에 매인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자신에게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자유는 어떤 것입니까? 42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신 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유였습니다.

신자 역시 같습니다. 신자는 자신을 보내신 예수님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예수님이 기뻐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기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앞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렇지만 나는 내 성질대로 하겠다'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것은 내 스스로 예수님을 물리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하면 뭔가 내가 손해가 되는 것 같고 바보가 되는 것 같고 무시 받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린 수시로 말씀을 거부해 버립니다. 내가 무너지기보다는 굳게 세워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고집이며 완악함 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자가 말씀을 따라갈 때 발견되는 것은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에게 온 나 자신이 죄가 있는 자이며 부족한 자라는 것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할 일은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날 위해 죽으신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나를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며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 자리에 나를 집어 놓는 싸움을 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말씀이 굳게 세워지기 위해 우리의 것이 죽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내가 죽어짐으로서 인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세워지는 삶에 힘쓰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