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강) 9:1-12 실로암으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보냄 받은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처럼 아버지께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나 말씀 자체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것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7:16절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보냄 받으신 것은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17:18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는 말씀을 하시고, 또 20:21절에서도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9장 역시도 이것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7장과 8장도 역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냄 받으셨다는 것이 중점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돌로 쳐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발을 했습니다. 스스로 흠없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자신들을 흠있는 죄인으로 선언하고 책망하는 그 말씀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보존하고 여전히 율법에 충실한 의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교훈은 모두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버지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과 일치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 당연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 앎은 말씀에 근거한 앎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관적인 개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전하고 가르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전혀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7-18절을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무지함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처지가 어떤 상태인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속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교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말씀을 실천하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신앙에 대해서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이 곧 자신의 수치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자신의 부족함과 수치를 보는 자가 곧 진정한 의미에서 보는 자이며 참된 신자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역시 스스로 본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부족함과 벌거벗은 수치와 눈먼 것 가련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은 다만 율법에 대하여 엄격하고 충실하며 말씀을 실천하고자 힘쓰는 자신들의 모습뿐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그들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그들에 대한 말씀은 곧 오늘 우리 자신을 경계하고 교훈하는 가르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신 이적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단순히 소경을 고치신 것으로만 말씀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은 소경을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본문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4-5절)는 말씀을 하시고, 소경의 눈에 침을 뱉아 이긴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눈을 뜬 소경을 두고 다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시비를 걸게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소경이 눈을 뜬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상태를 책망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이것은 9:40-41절의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이 말씀대로 소경 이야기는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하는 소경이며, 스스로 소경임을 모르는 그 상태가 바로 죄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말씀은 소경을 내세워서 스스로 본다고 하면서 자신의 소경 됨을 모르는 자들의 죄있음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제자들이 소경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절)라는 질문을 합니다. 제자들은 소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징벌을 받게 된 가능성을 소경과 그의 부모에게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특정한 불행과 고난을 죄로 인한 결과로 돌렸습니다. 이것은 욥기서에서 욥의 친구들이 욥이 당하는 고난을 욥의 죄의 결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생각이 성행하고 있었으면, 오늘 현대인들 역시 그러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경이 날 때부터 이미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라면, 제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소경의 죄인가를 물어봤을까요? 날 때부터 소경이라면 이미 모태에서부터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까? 제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마 당시 랍비들의 사고방식을 따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창 25:22절의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라는 말씀이나 시편 58:3절의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는 말씀을 이유로 사람이 모태에서부터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 질문은 제자들 스스로 자신들이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소경의 죄만 볼 줄 알았지 자신들의 죄는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소경이 아닌 것을 마치 죄가 없기 때문인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군가의 고난과 어려움을 대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게 '혹시 저 사람이 하나님에게 죄를 지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신의 평안을 마치 하나님에 대해서 죄가 없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제자들의 잘못된 점이며 오늘 우리들의 잘못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소경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경에게서는 죄를 봤으면서도 자신들에게서는 죄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에 있는 자와 평안에 있는 자신을 다르게 본다면 그것은 결국 제자들의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이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의 잘못됨을 지적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절)고 답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죄 문제를 배제하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 소경된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4,5절에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실 일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서 빛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일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들 스스로의 결단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닫고 빛이신 그리스도로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발견할 때 가능한 것임을 생각해 볼 때 결국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보게 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소경을 내세워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소경을 고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6,7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이 소경의 눈에 침을 뱉아 고치신 내용이 있지만, 침을 진흙에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발라 씻게 하시는 것은 아주 특이한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소경을 고치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분명 말씀만으로도 소경을 고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침이나 진흙에 어떤 치유 효과가 있기 때문으로도 생각할 수 없으며, 사람이 흙으로 빚어 졌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무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본문은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 그리고 앞서 있었던 바리새인들과의 시비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소경으로 하여금 실로암으로 가야 할 이유를 제시해주시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진흙을 바르지 않고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흙을 바른 상태에서 가는 것과, 진흙을 바르지 않은 상태에서 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으로 가는 것은, 뭔가 씻을 것이 있는 상태에서 가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몸의 더러움을 씻기 위해서 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반면 진흙이 없는 상태에서 실로암으로 가는 것은 단지 씻는다는 흉내를 내는 것일 뿐, 씻을 것이 있는 자로 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소경에서 진흙을 바르신 예수님의 행동은 소경을 씻어야 할 것이 있는 자, 즉 더러운 자로 실로암에 보내시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씻어주기 위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악함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진리를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그들의 아비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씀하시자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까지 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에게 실로암에서 씻고 눈이 밝아진 소경을 보내심으로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 되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특히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보냄을 받은 분입니까?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예수님이 유일한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가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경이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의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씻어주시고 눈을 뜨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는 분임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이 눈을 뜬 후에 자신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눈을 뜬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악한 우리들이 깨끗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되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이 보냄을 받으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는 소경과 같은 실로암의 경험이 있는 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악함과 더러움을 알고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씻겨지고 깨끗함을 입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깨끗케 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깨끗함을 입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신자의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실로암의 경험이 있는 신자는 자신의 열심과 행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그 어떤 행위로서 깨끗함을 입을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자랑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 자랑할 수밖에 없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