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강) 9:24-38 소경이 보게된 것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유대인들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경을 고치는 것과 같은 신비한 일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유대인의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러한 능력을 보인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증거로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입장은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서 전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는데 만약 소경을 고치신 것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정한다면 결국 자기들 스스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눈을 뜬 소경을 직접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을 예수님이 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경을 불러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리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로 소경 스스로 고백하게 함으로써 소경이 눈을 뜬 것을 목격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몰아가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소경은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1-33)는 말을 합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소경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 소경이 예수님을 잘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 때문에 무작정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놀랍게도 소경의 주장은 참으로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않으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소경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창세 이후로 아무도 소경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그것을 창세 이후로 아무도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없었다는 증거로 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소경은 그것을 하나님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신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셨다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죄인이 아닌 것이며,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이 소경의 주장인 것입니다.

소경의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몰아세우는 유대인들은 결국 자신들 스스로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되는 것이며, 그들이 곧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무리들임을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들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경을 고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유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으로 불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되는 어떤 행동이 있기 때문에 죄인으로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죄의 행동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없이 인간은 죄인인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규정이 행동을 보고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 자체를 두고 판단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본질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포기되어지기를 바라는 욕구로 살아갑니다. 그러한 인간이 기도한다면 그 기도에 과연 어떤 뜻이 실려있겠습니까?

요 14:14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15:7절에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겠다고 하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리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에 많은 희망을 두기도 합니다. '무엇이든'이라는 말을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도만 하면 다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열심히 기도만 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대단한 착각이요 병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무엇이든'이라는 말로써 자신의 욕구에 더욱 부채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인간의 욕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보면 '무엇이든'이라는 말 앞에 붙어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이름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할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과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누구의 뜻이겠습니까? 내 뜻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뜻이겠습니까? 분명 그리스도의 뜻일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마음에 세우고 살아가는 신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엇이든'에는 하나님은 시행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는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며 내 뜻을 포기하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그것은 그 기도가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소경이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경의 말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극히 성경적이며 하나님의 가르침에 전혀 벗어나지 않습니다. 소경은 자신의 경험에서 그리스도만을 보고 있으며, 그분을 자신이 알게된 사실 그대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34절을 보면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고 말합니다. 소경이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증거한 것 때문에 출교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소경은 눈을 뜬 대신에 자신이 함께 거하던 무리들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소경의 입장이라면 과연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차라리 소경으로 살지언정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쫓겨나도 눈을 뜨는 것이 좋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눈도 뜨고 쫓겨나지도 않는 길을 꿈꿀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최후의 순간까지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보호하려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예수를 싫어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임을 증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사는 곳이 아닙니다.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형제 자매하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섬기고 희생하며 살아가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사는 곳은 예수 믿기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믿기 전에는 세상과 어울리고 세상의 사고방식이 옳은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리스도를 안 후에는 그 모든 것이 악한 것으로, 그리고 세상이 멸망의 곳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 머물면서 세상과 맞지 않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을 전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 신앙은 결코 입으로 고백하고 생각만 하는 차원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많은 말을 하며 삽니다.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는 뜻을 세울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이 내것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냥 한번 해본 말이 아닐 수도 있고, 그 순간은 진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인생의 어려움이 없는 가운데서 쉽게 나온 말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고백함으로 해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참된 신앙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울타리가 아닙니다. 보호막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쫓겨나지 않고 외면당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예수라고 이름하는 우상을 하나 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려움이 있을 때 그동안 신앙을 떠벌렸던 자신의 말이 얼마나 힘이 없고 말만 있는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소경은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소경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말합니다. 쫓겨남을 당한 소경을 예수님이 만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구출하신 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을 세상과 다른 세계로 끄집어 내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서 끄집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은 세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소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며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세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부요하니 십자가 지시고 낮은 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이 보일리가 없습니다.

쫓겨난 소경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신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인자는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만이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고난을 거부하고 회피한다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증거하기를 피해버린다면 어떻게 고난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오늘 우리가 그러한 자는 아닌지 생각해보시고 여러분 모두 인생에서 단지 이름만의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고난의 예수님을 만나시고 그분이 여러분의 인생의 중심이 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