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강) 9:39-41 본다고 하는 죄

현대 교회가 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교회의 숫적 팽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숫자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우선으로 하면서 우리의 죄로 인해서 흘릴 수밖에 없었던 보혈의 피에 대해 감사하고, 자기의 죄에 대해 회개하며 그리스도께 나오는 지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날마다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보다 더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서기 위해서 힘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악하고 타락한 인간의 품성들이 그러한 참된 교회의 모습을 외면하고 조롱하고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마음인가?'를 보기보다는 '얼마나 성장했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이런 풍조로 인해서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감사하고 복음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참된 신자의 삶이 놀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세워진 교회라면 분명 그리스도를 우선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 교회라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다만 명목일 뿐 관심의 대상도 삶의 푯대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기쁨을 위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말하되 복음의 깊은 뜻과 내용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린 채 살아가는 거짓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충실해야 합니다. 내 기쁨보다는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충실해야 하고, 내 영광보다는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어지는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사람됨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존재하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이 곧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절)는 말씀 을 하시기 위해서 소경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소경을 내세워서 바리새인들이 곧 죄있는 자들이며 또한 그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도 예수님의 일이 소경 한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고자 하신 일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된 자들에게는 중요한 문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한 개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믿게 하셔서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의 이유는 잊어버린 채 우리의 일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39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는 심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심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심판을 인간의 죄에 대해 신이 주는 벌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벌은 재앙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사람들은 심판을 하나님에게 뭔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재앙을 내리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한가지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잘 살아가는 것을 심판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스스로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잘못된 행동을 했는데도 아무 일이 없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서 보여지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심판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의 심판을 생각해 본다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는 것은 심판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된 것은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을 심판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심판은 죄지은 자에 대해 재앙을 내리는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먼저 39절의 말씀이 실제로 보지 못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하고 보는 사람들은 소경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즉 육신의 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한다는 말씀을 보여주는 사람은 소경입니다. 그리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한다는 말씀은 바리새인을 두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심판은 소경과 바리새인들을 구분하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이 실상은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에서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죄있는 자는 분명 자신들이 아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소경을 봤을 때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물은 것입니다. 소경된 것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은 소경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들은 죄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죄 있는 자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보지 못한 자들을 보게 하시고 보는 자들을 소경되게 하심으로써 죄 있는 자가 보지 못하는 소경이 아니라 본다고 하는 유대인들이었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죄있다 없다는 소경인가 아닌가라는 외적인 문제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는 문제로 판단되어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고 보지 못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로 죄있다 없다가 판단되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소경을 볼 때는 소경은 죄있고 나는 죄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등장할 때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소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생각을 죄있는 것으로 심판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 중 어떤 사람이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소경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서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묻는 것은 우리도 복을 누릴 사람들인가라는 의미의 질문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들을 항상 복받을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절)입니다. 이 말씀에서 죄있는 것과 죄없는 것이 무엇인가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죄없는 것은 소경된 것이고, 죄있는 것은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본다고 하는 것이 죄가 그저 있는 것입니까? 죄가 그저 있다는 것은, 죄가 여전히 있다는 뜻입니다. 즉 전에도 죄가 있는 상태였는데 그 상태가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의 상태가 계속되어진다면 그것이 곧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그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야 말로 바리새인들을 심판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죄의 기준이 잘못되어 있는 세상에 '무엇이 죄가 있는 것인가?'가 제대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심으로 죄와 상관이 없다고 여겼던 자들이 곧 죄 있는 자로 판단된 것, 이것이 예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죄가 그저 있다'는 것은 죄가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죄를 해결하실 분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분이 곧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분임을 믿는 것이 곧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에게로 나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죄를 안짓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죄가 그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히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 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 눈에 진흙을 발라서 실로암으로 보냈습니다. 이것은 '너는 씻을 것이 있는 자다'는 骕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骕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보냄받은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보면 소경이 눈을 씻기 위해서 실로암으로 가는 것은 씻을 것이 있는 더러운 자가 하나님에게서 보냄 받으신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서 더러움을 씻음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깨끗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과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씻음 받고 '죄없다'는 선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한다'는 말씀은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게 하시고 씻어야 할 것이 있는 자임을 알게 하셔서 인자 되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여길 것이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죄가 그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그들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의 죄는 그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마음의 법으로 두고 사는 신자는 '죄없다'는 선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고백은 '십자가의 어린양의 피로써 영생을 얻었다'는 것으로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법이 되셔서 모든 일에서 '이것이 그리스도께 기쁨이 되는 것인가?'를 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의 법이 마음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면 그리스도를 생각은 하고 고백은 할지언정 살아가는 것은 '내 법'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내세우지면 실상은 자신의 영광과 자기 이름과 자기 기쁨을 위해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불의함을 보지 못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법이 되어서 나를 붙들고 있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