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강) 10:1-6 목자와 양

본문에서 말하는 목자와 양은 흔히 이해하는 목사와 성도의 관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목자로 성도를 양으로 말하면서 마치 목사가 성도를 이끌어 가고 성도는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마치 좋은 믿음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제가 항상 주장하는 것은 목사든 성도는 같은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양으로서 그리스도가 친히 목자가 되셔서 인도하십니다. 목사는 다만 그 일에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자로 부름 받은 것 뿐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목사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를 배우는 유익을 얻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목사를 존중할 것은 성도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그의 말씀에 대한 것이지 목사라고 하는 한 인간에 대한 존중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목자와 양의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2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우리에 양이 있는데 우리에 들어가는 자가 둘로 구분되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입니다.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은 문이 아닌 울타리를 넘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성경은 이 둘을 두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말하고,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목자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10장의 시작이 절도요 강도라고 일컫는 사람과 목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9장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0장에서 말하는 목자와 양의 이야기가 9장에 있었던 이야기와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9장에서는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예수님이 고치신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고치신 사건으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계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9:39-41절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드러납니다. 즉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본다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율법을 잘 지킴으로서 자신들이야말로 구원받은 자임을 자부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의 죄악 됨을 보지 못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후에 절도요 강도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절도요 강도로 불려지는 사람들은 스스로 본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목자와 구분이 되고 있는데 목자와 다른 점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이해할 것은 예수님은 왜 절도와 강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시느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문으로 들어가서 자기 양을 따로 불러냅니다. 이것은 우리에 있는 양이라고 해서 다 목자의 양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우리에는 목자의 양이 따로 있는데 목자가 양을 부를 때 그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이 목자를 따라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자의 양만이 목자를 따라나온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신앙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의도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문은 오직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의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율법 안에 있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악함을 깨닫고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율법에 주어진 진정한 문은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나 우리에 있는 양, 그리고 목자와 절도 강도,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른 데로 넘어 간다는 것에 대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풀이해 보겠습니다. 우리에 들어가 있는 양들을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안에 있는 이스라엘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럴 때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이 율법에 세워 놓으신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세워진 문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통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자는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자신의 악함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깨끗케 될 수 있음을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경을 실로암으로 보내실 때도 눈에 진흙을 발라서 씻을 것이 있는 자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소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서 자신의 악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힘쓰는 의가 보여지기 때문에 달리 의가 되어줄 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데로 넘어가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두고 절도요 강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도는 훔치는 자고, 강도는 빼앗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훔치고 빼앗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율법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구원은 우리의 공로와 의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흘리신 은혜와 공로로만 되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행함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를 훔치고 빼앗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도요 강도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처럼 믿음에 있어서 행함을 중요시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믿음은 행함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시각은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은 같은 것입니다. 즉 행함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고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행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행함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증거물일 뿐이지 결코 우리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나 도구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함이 있는 것을 믿음에 더 수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적인 사고방식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가로채는 절도요 강도의 행위라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의를 세우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자의 본분에 충실하는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자랑하는 것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말처럼, 이론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행위에 대한 자랑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자기 행위를 버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행위조차도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되어진 것임을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가를 철저히 인식할 때, 그리고 날마다 그 믿음에서 멀어지지 않고 살아갈 때 그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과연 이러한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행여 행위를 비교하며 믿음의 수준을 구분하는 것은 아닌지, 또는 나에 비해서 열심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는 사람에 대해서는 신앙의 차별을 두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하나하나 말씀으로 점검하는 삶이 되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말에 머물러 버리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를 가로채면서도 정작 내 자신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절도요 강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그 목자를 자신의 목자로 알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신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말씀을 두고 여러 소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말하지만 같은 예수가 아니고, 성경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혼탁한 세상 안에서 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목자를 따라나온다는 것은 진심으로 목자의 양이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방식이 유대인들이 율법을 생각하는 수준에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할지라도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바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를 수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뭘 해도 좋습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나 하시면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행함이 여러분 자신의 의로 머물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치며 말씀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예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생각이 여러분에게 머물러 있을 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는 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