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강) 10:7-9 양의 문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피조물된 인간이 전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아무리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외친다고 해도 우리의 삶이 그 말씀에 따르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가 한 말을 무너뜨린 결과가 되는 것이며, 성경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되 우리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예 예'하고 '맞습니다. 맞습니다'라고 한다 할지라도 예가 예로 드러나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되어질 때인 것입니다. '예'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치 않는다면 스스로 자신의 '예'라는 답을 부정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있는 비유인데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하루는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까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에게 일하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가기 싫다'고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였느냐고 묻습니다. 아버지가 원한 것은 '예'라는 답이 아니라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에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지런히 '예'라고 답하면서도 정작 말씀에서는 멀어진 채 살아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종말이 있다'고 하셨을 때 '예'라고 했다면 종말이 있음을 믿는 자답게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천국을 지향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집착하는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면서 회개하는 것으로서 종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곧 죄의 모습임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입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있으며 행동에 있고 삶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라고 대답했으면 '예'에 대한 책임이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참으로 조심스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기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목자가 와서 우리에 있는 자기 양을 불러내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정작 그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비유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시는 내용중 일부가 본문입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내용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수준 높은 지식적인 단어를 구사하신 것도 아니고 평소 유대인들의 사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목축을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분명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알아듣지를 못한 것입니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어려워 알아듣지를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는 우리에 있는 양이라고 해서 다 목자의 양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와서 우리에 있는 자기 양을 부르고,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목자를 따른다는 것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것을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구원에 대해서 유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따라서 이스라엘만이 구원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이고 구원받은 자로 태어난 것임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증거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할례를 행하고 있고, 또 자기들만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도 하지 않고 성전도 없으며 제사도 드리지 않고 율법조차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아닌 우리 입장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겠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또 다시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진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7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에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면 결국 예수님으로 들어가서 양들을 부르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것이 곧 절도요 강도라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절도요 강도냐 아니면 목자냐라는 문제는 우리를 넘어서 양들에게 가느냐 아니면 문이신 예수님으로 들어가서 양들에게 가느냐로 구분되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문이신 예수님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를 넘어가는 것은, 유대주의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율법을 가졌고 할례를 행하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복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곧 그와 같습니다. 이것을 절도요 강도라고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되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다는 것 자체도 우리 스스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우리들에게 찾아오심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인간의 공로는 철저하게 밀치면서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목자와 양이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진다는 것인데, 예수님이 문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세워진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내가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에는 나의 공로는 전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죄에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이다'는 고백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이 있다고 해서 신자로서 할 바를 다했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예'라고 했으면 '예'에 대한 책임이 그의 삶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고백했다면 끝까지 예수님의 은혜를 세우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라고 대답해 놓고 포도원에 가지 않은 맏아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공로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능력이고 힘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삶이 그 믿음을 바탕으로 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행위를 전혀 보지말고 살아가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행동이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는 참으로 위험한 생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을 자신의 공로로 되어진 것으로 가로채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절도요 강도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도달할 수 없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의가 될 수 없음을 외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우상을 찾는 타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문이신 예수님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기독교가 절대로 소홀히 해서 안될 가장 중요한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죄인으로서 심판을 받을 대상이었습니다. 사망에 갇힌 자가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의 힘과 재주를 신뢰하면서 큰소리치며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왜 죄인일 수밖에 없으며 왜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죄를 해결해줄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 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에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은혜로 남게 될 것이고, 내가 뭘 한다고 해도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에게서 자신의 행함에 대한 공로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양들에게 문이 되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안계시는데 양의 문이신 예수님이 오기 전에 이미 다른 문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양들에게 가려고 한다면 그게 곧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면 양에게 나아가는 문이 없다는 뜻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문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구약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문을 세워두는 것이 아닙니다. 즉 구약은 예수님이 아닌 율법이 문이고 그 문으로 안되니까 신약에 다시 예수님을 문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이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으로써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스스로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의가 되시는 분이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됩니다. 때문에 구약이든 신약이든 동일하게 양의 문은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예수님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 꼴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고, 예수님에게서만 양식을 얻을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살리는 양식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도, 은혜를 아는 것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문이 되신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