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강) 10:10-21 선한 목자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목자가 우리에 있는 자기 양을 각기 불러내고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사상대로 목자를 하나님으로 이해할 때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양이라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양,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비유에 대한 자세한 해석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다시 '선한 목자'라고 표현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1-15절)

여기 보면 선한 목자와 삯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와 삯꾼은 양과의 관계에서 구분되어집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은 제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선한 목자라고 할 때의 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함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함은 대개 성품적인 차원일 것입니다. 착하고 온순하고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고 화를 잘 안내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를 잘해주는 것을 두고 '그 사람 참 선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성품을 내세워서 선한 목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선하지 않겠는가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한 선함의 의미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삯꾼 역시 양과의 관계에서 그 정체가 드러나는데 이리가 올 때 도망치는 것이 삯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가 선한 목자라면 선한 목자는 오직 예수님 한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분이고, 때문에 양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린 목자를 알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선한 목자의 참된 양이라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선한 목자는 자기 양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생명이라는 큰 이익을 주기 위해서 대신 자기 목숨을 버리는 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삯군은 목자의 행세를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얻어지는 자기 이익을 바랄 뿐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얻을 이익보다 더 큰 손해가 될 일이 닥치게 되면 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선한 목자의 양은 누구겠습니까? 14절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아는 관계입니다. 즉 내가 목자를 모른다면 나는 그 목자의 양이 아니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다'로 끝날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아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 분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이 나의 목자이신 선한 목자의 음성임을 알고 그분을 따라가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이라는 큰 이익을 주기 위해서 대신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띠라서 선한 목자의 양이 목자를 안다면 그것은 내 목자가 나에게 생명을 안겨주기 위해서 대신 자기 목숨을 버렸음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목숨을 버림으로서 안겨준 생명이라는 큰 이익은 세상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 목자의 양입니다. 이런 양이라면 과연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이것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에 있는 자기 양을 불러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기 양을 찾아서 붙잡고 강제로 끌고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양을 부르고 양은 그 음성을 듣고 자신의 목자임을 알고 스스로 목자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생명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목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가 진정한 목자의 양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얻어진 생명이 세상에서 얻는 이익보다 더 큰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익 되어지는 것으로 인해서 생명이라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이익을 앞세우는 말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자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우리의 목자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양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큰 손해의 길을 가신 분입니다. 이러한 목자를 따라가는 양이라면 자연히 목사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세싱에서 얻어지는 이익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은 예수님 때문에 얻어진 이익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바리시고 대신 우리에게 얻게 하신 그 생명이 얼마나 큰 이익인가를 알 때 세상의 이익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비록 세상에서의 이익이 줄어들고 손해가 되고 불리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목자를 찾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삯꾼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1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합니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아는 것이 아버지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것은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그 뜻이 어떠한가를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아는 예수님은 양에 대해서 일할 때 자신의 뜻대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도 예수님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그 뜻을 알고 행동하지만, 삯꾼은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결코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양을 자신의 이익의 수단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양의 주인은 목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양의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할 때 목자는 양을 위해서 주인이 보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자가 양을 위해서 일한 그 대가는 누구에게서 받겠습니까? 양에게서 받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목자를 양에게 보낸 자는 양의 주인이기 때문에 목자는 일한 대가를 양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양의 주인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양을 위해서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가를 양인 우리에게서 받으셨습니까? 우리에게 '목숨을 버려서 너희를 살려준 대가를 내놔라'는 요구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만 '너희를 살린 예수님을 증거하라'는 것을 요구하실 뿐입니다.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은 아버지에 의해서 다시 살리심을 받고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 앉으심으로 그 대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는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고 일하지만 삯꾼은 양의 주인을 보지 않습니다. 때문에 양을 위해서 일하면서도 그 대가를 양에게서 받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만큼 일했으니까 너희는 나에게 그 대가를 내놔야 한다'는 이것이 바로 양에게서 일의 대가를 받음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삯꾼인 것입니다. 이처럼 양에게서 일한 대가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많은 이익을 줄 수 있는 소위 좋은 양들이 많은 목장에서 일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목사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목사에게 있는 큰 유혹 중에 하나는 소위 좋은 교회를 맡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생각하는 좋은 교회가 무엇이겠습니까? 부자가 많아서 헌금이 많이 나오고, 열심히 봉사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고, 그러면서도 목사의 일에 항상 협조하고 목사의 말에 반대하지 않고 목사가 시킨 대로 아무말 없이 잘 순종하고 대접 잘하는 그런 교회를 의미할 것입니다. 목사가 생각하는 나쁜 교회는 그 반대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양의 주인을 보지 않고 양만 보고 일한다면 결국 좋은 교회에서 일함으로써 많은 대가를 받고 싶어할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왕 목회하는 것 좀 더 편안하게 했으면 하면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신자는 신자를 위해서 보냄받은 관계일 뿐이지 신자에게서 자신의 이익을 얻어내는 관계는 결코 아닙니다. 신자를 흔히 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양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목사입니까? 양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하나님의 양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일한 대가는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받는 것이지 양에게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목사가 양의 주인을 보지 않고 양만 보고 일한다면 결국 양에게서 자기 이익을 얻어내려는 삯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목사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살피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교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푸른초장으로 인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 부분에 대해서는 추호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곧 목사의 일이라 여겨집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안에서 서로의 마음이 일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모이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주어진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서의 이익을 생각하며 산다면 그것은 곧 삯꾼일 뿐입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따라가는 양이라면 세상에서의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예수님은 잃을 수 없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인생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