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 있어서 믿음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미신적 성향에 의해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교인들이 말하고 있는 믿음이 주님으로부터 발생한 복음적인 입장에서의 믿음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발생한 미신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신적인 믿음이란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 열심히 기도하면 뭔가 일이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아지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뭔가 모르게 하나님이 벌을 줄 것 같은 불안감이 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헌금에서도 역시 내가 헌금하면 자신의 재물이 증가되고 헌금하지 않으면 재물이 축조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재물의 증대는 복이며 축소는 곧 징벌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복과 저주는 자신의 행동 여부에 달렸다는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신적인 사고방식에서 돌출된 잘못된 믿음인 것입니다.
미신은 꼭 점치는 것이나 무당이 굿하는 것, 그리고 시골에서 서낭당에서 기도하는 것들만이 아닙니다. 점쟁이나 무당들이 말하는 것은 복과 저주가 인간의 행동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하고, 액운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하라는 등등의 지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하고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는 등의 지시를 한다면 그것도 결국 미신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에게는 '징크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껌을 씹지 않으면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한다든지, 시합전날에 수염을 깎으면 그날 시합은 진다든가, 많은 선수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징크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징크스라는 것 역시 자기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말이 좋아 징크스지 결국 미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행동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신적 믿음에 의해서 참된 믿음이 믿음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미신적인 믿음에 의해서 참된 믿음을 밀쳐내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24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니까 우리가 당신에 대해서 의혹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라는 의도가 있는 것 같은 말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싶은데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의혹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현실적인 신앙체제를 허무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24절의 말 역시 예수님을 알아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확실한 답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도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그토록 예수님을 배척을 하는 것입니까? 22-23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도전을 받을 때는 본문대로 하면 수전절이라는 절기가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은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을 다니시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먼저 수전절이라는 절기와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수전절은 성경에서 본문 한곳에만 등장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명하신 절기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수전절은 더럽혀진 성전을 성결하게 하고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하누카', '빛의 절기'라고도 합니다. 이 절기가 형성된 배경은 BC 168년 수리아 총독 안티오코스 에피파 네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제우스 제단으로 바뀌었는데, BC 164년 마카비의 반란에 의해 성전이 탈환되고 재봉헌된 것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이때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으며, 크리스마스와 동일한 계절에 지켜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수전절이란 절기는 하나님을 위한 절기라기 보다는 우상으로 더렵혀진 성전은 다시 찾고 깨끗이 정화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절기로 보여집니다. 즉 성전을 위한 헌신의 절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행각은 성전이 제일 바깥쪽 벽에 있는 한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그 내부가 여러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제일 바깥쪽 벽으로 해서 안쪽에 벽이 있고, 다시 또 그 안쪽이 벽이 있어서 경계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전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지성소에 가까이 올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제일 바깥쪽은 '이방인의 뜰'이라고 해서 이방인들은 그곳까지밖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쪽은 유대인들이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쪽은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으며 가장 안쪽은 지성소가 있으며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가장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에서 솔로몬의 행각은 이방인들이 들어가는 이방인의 뜰에 있는 한 문이었던 것입니다. 즉 솔로몬의 행각은 성전에서 가장 천하게 취급되는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예수님이 다니시다가 유대인들의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만나시기 위해서 만드신 거룩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지성소로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신데 인간은 악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무데서나 하나님을 부르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 거룩한 존재가 되어져야 했습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 죽은 제물의 피를 들고 지성소로 나아가서 피를 뿌림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깨끗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문이 되시는 분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스스로 제물이 되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서 누구든 그분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성전이셨고 지성소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문은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만드시고 지성소에 피를 뿌림으로서 이스라엘을 만나주신 것은, 장차 오실 참된 성전이 되시는 분이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제물의 피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이 성전의 지성소였던 것이지 눈에 보이는 성전의 지성소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이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참된 문으로 오실 분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 지성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나 지성소는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다만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은 솔로몬의 행각, 즉 유대인들이 가장 천한 곳으로 여기던 이방인의 뜰에 계셨고 유대인들은 참된 문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지성소를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으로서의 역할을 다 마치고 폐지되어 버린 문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는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년에 한차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나가서 피 뿌리면 그것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가는 다른 통로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예 그들은 지성소에 나가서 피 뿌리는 것말고 하나님께 나가는 다른 통로가 있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하실 때 유대인들로서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문이 있는 그들로서는 또 다른 문이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이 예수님을 밀쳐내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성전이 있었고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거룩한 성전이기에 성전에 헌신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내신 나를 믿는 곳이 곧 아버지께 영광이고 아버지께 헌신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수전절에 솔로몬의 행각에 다니셨다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수전절은 성전에 대한 헌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전에 대한 헌신이 곧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수전절 역시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성전을 높이는 수전절에 성전이신 예수님은 성전에서도 가장 천한 곳에 계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것은 결코 거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가장 거룩한 곳으로 여기는 지성소는 결코 거룩이 아니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도 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의미에서 수전절에 솔로몬 행각에 계셨던 것입니다.
거룩은 어떤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행동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예수님말고 또 다른 거룩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곧 예수님을 밀쳐내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창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거룩이란 말이 최초로 등장한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일곱 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구별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거룩은 구별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 20:26절의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된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한 자로 여김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달리 거룩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이 아닌 그것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당을 거룩하게 여기면 예배당에 헌신하는 것을 곧 하나님께 나가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을 밀쳐내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할 일은 거룩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믿음 안에서 거룩한 자로 불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