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강) 10:25-42 예수의 죄

예수님은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임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고 하늘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는 주장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오직 황당하다는 느낌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하나님고 하나인 존재로 주장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죄로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죄는 바로 '참람죄'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예수님의 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돌로 쳐서 심판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32절)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보였는데 그 중에 어떤 일이 잘못된 것이기에 돌로 치려 하느냐는 뜻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절)고 말합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부터는 그 어떤 잘못된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일인데 조그만 꼬투리라도 찾아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는 조그마한 잘못된 것도 찾아내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신자가 예수님의 도를 전하는 것은 결코 말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채 다만 교회에 대한 봉사를 염두에 두기도 하지만 사실 신자의 삶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언어로 남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아무리 그리스도를 전하고 천국을 말하고 심판을 말한다고 해도 진심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삶이 과연 그리스도를 말하는 삶이고 천국과 심판을 말해주는 삶이냐는 것입니다. 이점을 소홀히 한다면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되 삶으로는 예수를 부인하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만 보여줄 뿐입니다. 즉 내가 전한 예수를 내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죄를 사람이 되어서 자칭 하나님이라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34-36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봅니다. 그런데 사람인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은 율법에 보면 하나님도 사람을 가리켜서 '신'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도 사람을 신이라고 하셨는데 너희가 사람으로 여기는 내가 나를 하나님이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신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은 옳은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이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고 있고, 사람인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 죄라고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사람을 신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전혀 오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이 사람을 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편 82:6절을 보겠습니다. 거기 보면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켜서 신이라고 하고 지존자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은 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이 사람을 가리켜 신이라고 한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 죄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신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같습니까?

시편 82편을 읽어보면 6절에서 언급하는 '너희'는 단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재판장을 두고 신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재판장은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억울한 자가 없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비록 재판은 사람이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기 때문에 결국 판단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판장을 신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재판장이라는 사람 자체가 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이 신적인 일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신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판장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보여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판장이 사사로이 자기 유익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재판장이라는 것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82편을 보면 당시 재판장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2절에 보면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라는 말을 합니다. 악인의 낯을 본다는 것은 재판을 할 때 악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엉터리 재판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로 인해서 돈없고 힘없는 약자들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82편의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판단하소서 모든 열방이 주의 기업이 되겠음이니이다"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지존자의 아들의 역할을 하고 신의 역할을 하라고 세운 재판장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따라서 뇌물을 받으며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이 세상에 이제 하나님이 일어나서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삽의 말대로 세상을 판단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시고 말씀만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정한 지존자의 아들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7-38절에 보면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을 믿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행한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라는 분을 하나님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분으로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믿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시편 82편에서 말하는 재판장처럼 뇌물을 받고 악인의 편을 들고 약자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천한 자 죄인들을 가까이 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왜 약자를 무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함이 되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자신들의 현세적인 위치를 지키기 위한 심사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유대인과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비판과 정죄가 곧 나에 대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