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강) 11:1-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은 날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소위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지만 이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큰 오해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서 신앙까지도 전혀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신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나사로에 대한 얘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11장의 나사로 얘기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고 간단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병든 나사로를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을 가르치기 위해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는 기적을 보이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또 나사로의 얘기를 이런 시각에서 이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에서 4절의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는 말씀과 5절의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는 말씀과 6절의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는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본다면 단지 부활에 대한 교훈을 하기 위해서 시작된 얘기는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와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냥 나사로를 문병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의 병을 고쳐달라는 의미의 부탁이었을 것입니다. 5절의 말씀울 보면 예수님은 본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를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이고, 예수님이 사랑하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다른 모든 일을 제치고 빨리 달려가서 고쳐주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 상식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을 하면서 이틀을 더 유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부러 이틀이나 늦게 가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 일로 본다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고 또 살리실 것을 아셨으니까 나사로가 죽은 뒤에 가신들 나사로는 손해 볼 것이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만큼 고생을 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염려와 근심이 지속될 것이고, 또 오라비가 죽은 상황에서는 큰 슬픔과 고통과 절망을 겪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왕 살리실 것이라면 하루라도 덜 고생을 하게 하고, 빨리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사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 애매하게 병이 들고 고생한 것이 됩니다.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소경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가 죄를 범했기 때문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죄를 범해서 소경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소경된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에도 순종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실제 병이 든 나사로나 소경으로 태어난 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이 들지 않아도 될 것을 하나님 때문에 병이 든 것이고, 소경으로 태어나지 않아도 되었는데 하나님 때문에 소경으로 태어났다는 억울함과 불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육신이 편안할 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직접 당사자가 되어질 때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어려움의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할 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입니다.

여러분이 중한 병에 걸렸을 때,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병이 들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고, 따라서 뭔가 억울하다는 반발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을 나사로를 하나님이 억지로 병에 걸리게 하고 소경되지 않을 사람을 소경되게 한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납득하기 곤란한 경우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병에 걸린 것이라면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병에 거리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이 병이 안들어야 할 사람이 병든 것입니다. 소경된 것이 소경이 안되어야 할 사람이 소경이 된 것입니까? 세상 그 누구도 질병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은 죄속에 있고 사람은 날 때부터 죄속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갈수록 후패해져 가고 병들고 죽는 것은 죄속에 있는 인간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이 늙어 가는 것이 우리는 늙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늙게 하신 것입니까? 죽을 사람이 죽는 것이고, 늙을 사람이 늙는 것이고 병들 사람이 병이 든 것뿐입니다.

사람이 실패해서는 안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가면서 실패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실패가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에 누구도 인생에 대해서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들은 다 실패해도 나만큼은 실패하면 안되고, 남들은 다 병에 걸려도 나는 병에 걸리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때도 자신을 실패하지 않게 해주고 병에 걸리지 않게 해주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하셨다는 말에 대해서도 우리의 사고는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심으로써 그 가정의 우환을 해결해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하셨으면서도 병이 든 나사로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일부러 이틀을 지체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인간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이 아니라면 우리는 전혀 희망이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사로가 병든 것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까? 앞서 말한대로 나사로가 병든 것은 병이 들지 않아야 할 사람이 병든 것이 아니라 죄속에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병을 고치시는 분으로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병을 고치셨던 것은 단지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짊어지기 위해서 오셨음을 보여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경우에는 병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고치심으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은 인간의 존재가 전혀 희망이 없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전혀 희망이 없는 존재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 당장 병을 고쳐주심으로써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인간을 고치셔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들고 죽는 것은 죄가운데 있는 인간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태인 인간을 보여주고, 그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죽은 자를 일으키심으로 인해서 인간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되어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절망의 상태인 죄인에 불과한데 예수님의 은혜로 일으킴을 받았음을 고백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반발을 가진다면 그것은 아직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았다는 증거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항복시키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실패하게 하셔서 '너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아느냐?'를 물으십니다. 질병이 있게 하셔서 '너는 병들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임을 아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 물음 앞에서 '예 나는 이런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오셔서 나를 일으키시는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나는 절대로 희망이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육신을 근거로 해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후패하고 썩어지는 육신을 기준으로 하지말고 영원한 생명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록 지금 순간은 어려움이고 고통일 수 있는 것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욱 더 하나님께 끌어 놓기 위해서, 하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것에 수긍이 되어질 것입니다.

실패와 어려움 속에서 마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좁은 소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무지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겪든 그것으로 억울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힘들게 살든 질병으로 고생하든 그 모든 것은 죄인된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이 곧 그분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