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믿음의 힘을 잃어버리는 이유 중의 대부분은 믿음의 본질이 아닌 것을 믿음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믿음은 신자를 하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능력입니다. 때문에 하늘의 생명에 마음을 둔다면 그는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기쁘고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힘있는 삶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믿음에서 생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의 결과로 세상의 것을 더 많이 받게 되고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함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기대한 것을 믿음에서 얻지 못할 때 자기 믿음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자로서 모든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마음을 두는 것이 곧 생명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생명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몇 주 동안 계속해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나사로를 찾아가지 않으시고 결국 죽은 뒤에 찾아가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분명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힘들고 곤란할 때, 그래서 예수님을 부르고 도움을 청할 때 달려와서 우리의 일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병이 들었으면 병에서 건져주시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려운 일에서 건져주셔서 우리를 평안하게 만들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원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병든 나사로 때문에 와달라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이틀을 늦게 가십니다. 그 결과 나사로는 죽습니다.
물론 예수님 편에서 생각하면 다시 살리실 것이니까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사로의 가족 입장에서 본다면 고통이고 어려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든 나사로의 입장에서 행동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자기 백성을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 사정만 생각합니다. 병이 들었으면 병든 내 사정만 생각합니다. 힘든 일을 당하면 힘든 일 때문에 고통을 받는 자신만 생각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의 자기 사정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보지 못하는 하늘에 대한 자기 입장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예수님 또한 세상에서의 우리 사정을 도와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을 위해서 오셨음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설사 듣고 배웠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하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하늘의 생명을 위해서 행동하시기를 바라기보다는 세상에서의 내 사정을 도와주시는 행동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받은 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복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받은 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복을 달라'고 애원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세상의 것들이 좋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하찮은 것들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배설물로 썩어질 것으로 보여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진심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면 사랑하는 자기 백성에게 하찮은 것, 썩어질 것, 배설물과 같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행동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우리들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행동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히려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시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으로 증거될 것입니다. 생각이 잘못되어서 썩어질 것을 썩어질 것으로 보지 못하고 귀하고 소중한 것을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보지 못한다면 썩어질 것을 썩어질 것으로 보게 하시고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바꾸시고 고치시기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아닌 믿음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병든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은 병든 나사로가 죽은 뒤에 가시는 이유를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으로 드러내십니다. 즉 믿음을 위해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서는 원망밖에 나올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도 나사로가 죽은 뒤에 오신 예수님에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32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오지 않으신 예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이왕 오실 것 좀 더 빨리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셨으면 좋지 않습니까?'라는 원망인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왜 늦게 오셨을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늦게 오셔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자기 마음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신 것에 대한 원망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원망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사정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렇게 고쳐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의 길을 결코 제대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에게서 기대할 것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오신 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예수님에게 기대할 것은 하늘의 생명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다른 것을 기대하기를 포기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신자라고 하면서도 예수님과는 다른 생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항복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항복시키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우리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회복시키시고 굴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와 싸우시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 예수님이 동원되신 것이고 이 싸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힘든 일이 있고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나사로의 생명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일으키시기 위해서 오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이고 이 믿음을 위해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생명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생명이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영생은 내가 죽지 않는 것입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도록 사는 것이고 성공하고 출세한 자로서 큰소리치며 사는 것이 인간들이 기대하는 생명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된 생명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생명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을 우리의 육신이 다시 사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부활된 것이고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죽어도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믿음을 위해서 나사로가 죽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늦게 가셨다는 뜻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죽은 것으로 말하지 않고 잠든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를 가리켜서 '잔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의 표현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죽은 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고 마지막입니다. 하지만 잠든 것은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일어날 때가 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나사로에게 '잔다'라는 말을 하신 것은 나사로가 예수님으로 일으킴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예수 안에서 보는 것과 예수 밖에서 보는 것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밖에서는 죽은 것으로 끝납니다. 죽음으로써 다시 일으킴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과 멸망으로 끝납니다. 죽은 자로 끝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의 인생은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다시 일으킴을 얻는 것이 하늘의 생명을 허락 받은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생명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에게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에도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행동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도 외면하십니다. 고통에 있는 우리를 그냥 그대로 두고 보시기도 합니다. 육신의 일이 해결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위하여 사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한 일임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이해하신다면 여러분은 진심으로 복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으로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참된 생명을 위해서 사신다면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