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강) 11:17-30 부활과 생명

기독교의 본질은 부활과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 이것을 빼 버린다면 기독교는 분명 한낱 종교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부활과 생명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부활을 알고 생명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신자들은 부활을 알고 생명을 아는 자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과 생명을 아는 자로 살아간다고 할 때 과연 그 부활과 생명으로 인한 삶의 유익이 있느냐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활과 생명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들에게만 이해되고 환영을 받고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에서는 부활과 생명이 아무것도 아닌 허무맹랑한 말로 여겨지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능력이고 엄청난 축복이며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바로 부활과 생명을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부활과 생명을 알고 믿는 자로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인한 삶의 유익이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활과 생명을 아는 자나 모르는 자가 살아가는 것이 동일하고 부활과 생명으로 인한 삶의 유익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혹 부활과 생명을 알기는 하되 그 능력과 축복에서는 멀어져 있기 때문은 아닌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마르다가 대화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말하는 것에서 부활과 생명을 알기는 하되 그 능력에서 멀어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마르다의 불만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있을 때 예수님이 일찍 오셔서 계셨다면 죽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라는 불만인 것입니다. 결국 나사로가 죽게 된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불평에 대해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화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지막날 부활에서 다시 살 것을 압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면 결국 마르다는 다시 산다는 말씀을 단지 마지막 날이 되면 부활한다는 의미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마르다의 생각이고 이 생각이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부활에 대한 보편적인 사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교회 역시 부활을 말하면, 마지막 때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날 다시 산다는 것이 부활에 대한 현대 기독교의 교리고 믿음이고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말하는 부활신앙이라는 것은 단지 죽은 후에 다시 살 것을 믿으면 그것을 부활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성경이 그렇게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 신자로 살아가는 이상 믿어야 하는 교리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로 살아가고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최고의 복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복으로 기뻐하기보다는 세상의 복을 더욱 염원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부활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지식이 마르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부활을 아는 자로서 부활을 모른 자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마르다는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때 다시 산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으로 나사로가 죽었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말해주는 것은 신자가 안다고 하면서도 아는 것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과 삶이 별개의 문제로 각각 구별되어져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저 막연하게 마지막 때가 되면 살아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나사로의 몸이 다시 살 것을 말하기보다도 인간의 생명이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온전케 됨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다만 마지막 때가 되면 다시 산다는 부활 교리만을 내세울 뿐입니다. 부활이 그리스도에게 있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안에 있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죽은 자가 때가 되면 다시 사는 것으로 설명하지않습니다. 다만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할 뿐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부활은 죽은 내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 누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자체시고 생명 그 자체시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활과 생명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지 부활과 생명에 대한 지식은 아니라고 말할 수있습니다.

부활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고 생명이시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이 곧 부활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만이 부활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시라면 내가 어떤 환경과 상황에 있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심으로써 부활과 생명에 참예한 것입니다. 때문에 나사로가 죽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함께 하신다면 그는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몰랐습니다. 다만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에게 나사로는 죽은 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라비가 죽을 때 왜 여기 안계셔 주셨는가만 가지고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존재 이유가 부활과 생명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병을 고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망에서 일으키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에게서는 우리 육신의 문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육신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그는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육신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내가 육신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도우시지 않았다는 것으로 원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믿음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삶의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나중에 죽으면 천국 간다거나 마지막 때 부활된다는 수준에서 벗어난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은 단지 마지막 때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 뿐 현재를 살아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는 답을 이미 가지고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의 육신을 생각하지 마시고 영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망에 처한 내 영혼을 예수님이 일으키셨습니다. 이 은혜로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관심을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에 둔다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어떤 유익을 얻고 살아가는 가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바라볼 때 예수님으로 인한 그 어떤 유익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형편이 더 나아진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더 못한 형편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예수 믿은 것 때문에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불평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으로 인해서 누리는 그 어떤 유익도 없는 채 예수님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무덤에 죽어 있는 나사로는 예수님이 없는 인간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간의 몸은 썩을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사망에서 일으키시고 산 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우리를 산 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나를 일으켜 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일으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베푸실 일을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베푸신 일에 감사하고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장차 천국에 갈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천국에 있는 자로 사는 것이어야 하고,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부활된 자로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누리는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시고 예수님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