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강) 11:45-53 기적과 진리

보물은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보물로 여기는 사람에게 보물이지 보물을 모르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보물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서도 같습니다. 진리란 진리의 귀함을 알아보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진리일 뿐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결코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찮은 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귀한 보물로 착각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아닌 것을 귀한 진리인 것처럼 여기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진리인데도 불구하고 소홀히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문제에서 이런 잘못됨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의 믿음에 있어서 크게 잘못된 것 중 하나는 믿음을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것인지를 마음 깊이 느끼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물을 보물이라고 말하면서도 팽개치고 보물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저 옆에서 '이것은 보물이다'라고 말하니까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수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혹 이런 잘못됨에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치우고 '니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그러자 죽어있던 나사로가 수족에 베를 동인 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옛날 이야기로만 듣지 마시고 이 기적을 실제 목격을 하고 있고 체험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기적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방식 가운데 우리들의 착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설사 우리가 기적을 목격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놀라운 기적을 하나만 보여줘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의심없이 믿겠는데 기적같은 기적을 전혀 보지 못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물을 찾지를 못하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7-48절에 보면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죽어서 무덤에서 썩고 냄새가 나는 나사로 일으켜 나오게 하셨다는 것을 듣고도 그런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것을 걱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만 더욱 굳어질 뿐이었습니다.

인간은 기적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감히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기적을 들었으면서도 그 기적을 행하시는 분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로 인해서 방해가 될 수 있는 자기들의 지위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 것인가만 연구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치는 그분이 죽은 자를 말씀으로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다는 것을 들었다면 '우리가 죽이려고 하는 예수라는 저 사람이 과연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옳은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 행하는 것은 아닌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보고 죽이려고 하는 엄청난 죄의 길로 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은 분명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이미 선포한 것이고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이미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님을 증거하셨는데, 그것으로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분이라는 것이 증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을 걱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들에게는 놀라운 기적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감히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보이셨는데도 '우리가 죽이려고 하는 저 예수라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다만 죽여 버리면 많은 사람이 예수를 좇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유대인 사회안에서의 자신들 지위 또한 굳건히 지킬 수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리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가 어떤 것인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이 전파되는 환경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듣고 또 듣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따라 자신을 살피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혹 말씀을 잘못 아는 것으로 인해서 말씀과 다르게 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보여지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말을 하면 따분해 합니다. 다 아는 사실을 또 반복한다고 하면서 지루해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면서 마치 자기를 무시하는 말인 듯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 유치원생에게나 할 유치한 말이고, 윤리와 도덕에 대해서 얘기하면 자신들의 인격 향상을 위해서 필요한 말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고 진리를 알고 지리로 살기를 소원하는 신자라면 그리스도말고 나눌 이야기가 뭐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오직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적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서도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만 보일 뿐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권위와 위치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자기 인생에 대한 욕심이 결국 기적에서 생명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목적과 욕심이 있는 인생을 고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진리들이 나를 망치는 적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말씀을 보면서도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자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축복이 보일 뿐입니다.

때문에 아직까지 자기 목적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놀라운 것은 지금 이시간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자로 이 자리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고집하고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고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불씨가 살아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고 놀라운 기적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모닥불 위에 물을 계속 붓고 있는데도 불씨가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그 불씨로 인해서 물이 부어지는데도 계속 불이 붙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런 경우와 같습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는 믿음의 불씨를 꺼뜨리는 식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보다는 세상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고 나이 욕심을 내 인생을 살아가려고 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예수님에 대한 불씨가 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인 것입니다. 이 기적으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내 스스로 교회를 다니고 내 뜻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봐도 그 기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고 기적을 체험한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높이는 도구로 이용해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수준이기 때문에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마치 우리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찾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을 봤다고 해도 그것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도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보다 더한 기적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믿는 자로 사는 것은 참으로 귀한 축복안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