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강) 12:1-8 마리아의 향유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려 찾아가신 것은 나사로의 죽음을 이용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가르치시겠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의해서 무덤에서 걸어나오는 나사로를 통해서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 있는 우리를 일으키시고 나오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임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듯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러한 무덤에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사로의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인생의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덤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보고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두고 생각할 때만 예수님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보다 귀한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이야기는 11장의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다른 곳으로 가셨다가 다시 유월절 엿새 전에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오십니다. 그러니 그 동네가 예수님을 얼마나 환영하겠습니까? 그래서 2절에 보면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까지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는 말씀을 보면 나사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나사로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무덤입니다. 무덤에서 썩어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나사로의 본래 자리입니다. 그러한 그가 지금 살아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하는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에베소서 2:5-6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나사로가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이 말씀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신자가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힌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에 그것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그때가 아직 오직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사로는 바로 예수안에서 신자에게 되어질 일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덤에 있을 자가 예수와 함께 잔치 자리에 앉아있는 것,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질 복이며 영광이기에 신자는 이것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막연하게 예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심으로 귀한 분이기에 보여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아깝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가룟유다가 시비를 겁니다. 왜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삼백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상당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유다의 말대로 예수님의 발에 부어서 허비해 버리는 것보다는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실리적이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행위를 두고 어떤 것이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행위인가를 따지기도 하지 않습니까?

비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으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보다 더 가치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예수님이 안계셔서 예수님의 발에 부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연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7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해서 말씀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나서 예수님과 함께 앉아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실 일은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것임을 보여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세상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마리아의 행위인 것입니다. 마 26:13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행동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파할 때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그 행위까지 함께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향유를 부을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도 안계시는 지금 어디에 누구에게 향유를 부어야 합니까?

마리아가 보여준 행동은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 향유보다 더 귀하고 가치있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마리아의 행동이 보여주는 것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예수님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라 무덤에 있는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무덤에 있는 비참한 자로 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소중한 것은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마태복음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의 행동도 같이 전하라고 하시는 것은 마리아가 행한 대로 할 것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망에 있는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가르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심을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삶이 그 무엇도다 예수님을 가장 소중히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예수 하면서 돈을 더 아까워한다면 그것은 진실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마리아에게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나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은 것을 나무랬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심으로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돈이 아까워서 한 말이었습니다. 6절에 보면 유다는 돈 궤를 맡은 자로서 거기 넣은 것을 훔쳐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다를 도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단순한 공금횡령으로 보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지금 우리는 유다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유다가 돈 궤를 맡았다는 것은 유다에게 있는 돈이 자기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즉 유다에게 있는 돈이라고 해서 유다의 소유가 아니라 단지 맡은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돈 궤를 맡은 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에게는 돈 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그 궤에 돈을 넣어주십니다. 얼마가 되었든 하나님이 넣어주신 것을 여러분이 맡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돈 궤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자신만 보인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하기보다는 돈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내 소유이기 때문에 내가 지켜야 한다는 마음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돈이 아까울 것입니다. 내 돈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마리의 행위에서 예수님을 보기보다는 돈을 봤습니다. 평소 돈을 더 소중히 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돈을 훔쳤던 것이고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향유가 허비되는 것만 봤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돈이 우리를 무덤에서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사망에서 일으키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돈을 보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소중히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자가 돈이 있든 없든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 분임을 보여야 할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서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돈이 많다고 해도 돈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귀한분임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비싼 향유를 소유하고 있다는 기쁨보다는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향유를 부은 행위로 보여준 것처럼 돈을 가지고 있는 기쁨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기쁨을 보여줘야 할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마리아가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행위에서도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가가 보여집니다. 여자에게 머리털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에게서 가장 낮다고 할 수 있는 발을 씻기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낮은 자이고 반면에 예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시고 과연 지금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