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강) 12:9-19 나귀타신 예수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한다면 분명 여러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셨다고 마태복음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그 외에 다른 목적은 없습니까? 즉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말고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신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한 인생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이 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성경에서 그러한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육신의 문제를 도와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그 어떤 내용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영의 문제, 즉 구원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목적이 일치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그 목적안에서만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서 벗어난 다른 이유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결국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예수님에 대해 실망하게 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내용입니다. 12절을 보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유월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소리 높여 외칩니다. 이것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을 반기는 정도가 아니라 열렬한 환영을 한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월드컵에서 4강을 한 국가대표 축구선수들과 감독인 히딩크가 카퍼레이드를 할 때 그들을 '영웅'으로 떠받들면서 환영을 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시 그들에게는 영웅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호산나라는 것은 '지금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호산나를 예수님을 찬양하는 용어로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성가대의 이름에 '호산나'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로나 호산나라는 용어가 '예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의미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구세주로 본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핍박받고 억압받는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능히 그럴만한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들은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핍박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로 오신 분이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그동안 핍박받아온 눈물의 세월이 끝나고 이제는 모든 나라의 중심에 굳게 설 이스라엘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영웅처럼 환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9절에 보면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예수님만 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면서 이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면서 자신들이 죽어야 할 몸이고, 그러한 자신들을 살리실 분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생각하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을 것이고, 그러한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경외의 시각으로 봤을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분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에서 자신들의 해방을 꿈꿨던 것입니다.

11절에도 보면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말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면서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을 믿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오시는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열렬히 환영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시는 그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들을 이방나라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주실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반해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한 무리들이 결국 예수님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요 19:12절에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 무리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왜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돌변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것에 대한 분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의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능히 자신들의 기대를 이뤄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눈에 비췬 예수님은 붙들려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위기에 처할 정도로 맥없고 나약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 자신들이 메시아로 여겼던 사람이, 소위 하나님이 보냈다고 하는 그러한 자가 죽어 가는 데도 하늘에서는 전혀 예수님을 구해줄 기미가 없습니다. 그저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줄 가능성은 전혀 없음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한순간 예수님은 전혀 쓸모 없는 분으로 전락 되버립니다. 자신들이 기대한 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예수이기에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의지해야 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버려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인은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배신하지 말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본문은 '우리는 유대인처럼 하지 말자'라는 각오와 교훈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우린 본문에서 유대인이 예수님을 환영했다가 버려버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혹 그러한 잘못된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가졌던 잘못된 기대가 혹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보면서 이적의 의미는 생각하지 못하고 이적을 행하는 그 능력만 선호했습니다. 이적을 행하는 그 능력이 자기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것은 능력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시면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보이시고자 하셨고,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면서 진심으로 소경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적 하나하나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왜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가를 암시하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표적을 표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육신에 도움이 되어줄 예수님으로 기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곧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농사용으로는 말을 키울 수가 있지만 전쟁용으로는 키우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힘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위해서 말을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을 기르겠다는 의도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곧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시 20:7절에 보면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병거, 말을 의지하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나귀는 전쟁용이 아닙니다. 농사지을 때나 물건을 실어 나르는 용도로 쓰는 동물입니다. 더군다나 나귀 새끼라면 그러한 용도로도 쓸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힘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을 타고 오신다면 힘의 상징인 늠름한 장군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과는 거리가 먼 나약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명백히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약자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다만 자신들의 구원을 기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달랐습니다. 애당초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구원해주기 위한 목적을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잘못된 기대를 가짐으로써 결국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쓸모 없는 분으로 여기고 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십니까? 과연 그것이 전부이십니까? 혹 그것말고 또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도와서 육신의 일을 좀 편안하게 해줬으면 하는 기대는 없습니까? 십자가가 십자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같은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버리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만 있는 십자가만 아니라 돈이 포함되어 있고, 형통함이 담겨 있는 십자가 아닌 십자가를 기대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힘을 주기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늘의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여기에만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