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강) 12:20-24 한 알의 밀이 죽으므로

본문에서 유명한 말은 24절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구절을 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이 희생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이 희생하신 삶을 산 것처럼 신자도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알의 밀이 죽으므로 많은 열매라는 결과를 맺은 것처럼 신자가 희생하는 삶을 살 때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20절을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유월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빌립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청을 합니다. 그러자 빌립이 그 사실을 안드레에게 말하고 다시 안드레와 빌립이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서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뵙기를 원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라는 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청에 대해서 '만나겠다'라든가 아니면 '만나지 않겠다'라는 답이면 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답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과 헬라인이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는 것이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처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음을 언급하신 후에 24절의 한 알의 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24절의 말씀이 있게 된 배경을 생각해 보면 24절의 말씀을 신자에게 희생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희생하는 삶에 대해서 가르친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내용이 희생하는 삶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 예수님이 산상수훈과 같은 상황처럼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는 것이라면 24절의 내용이 희생에 대해서 교훈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은 설교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훈적인 의미로 본문을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만약 희생의 삶에 대해서 교훈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청을 하고, 그에 대한 답으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묻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는 헬라인의 요구에 대해 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먼저 요한복음에는 '때'에 대한 말씀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맨 먼저 '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2:4)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상황적 배경은 잘 아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2:4절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항아리에 물을 붓게 하시고 그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의 때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난처함에 처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때를 언급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고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이것은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이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와 연관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있게 될 기적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기적이 곧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때가 되었을 때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2장의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뒤에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인간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이루어질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즉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이 땅에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고 그로 인해서 죄인된 자의 새롭게 태어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시는 기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쓸모 없는 존재가 쓸모 있는 존재로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물대로 포도주는 포도주대로 쓸모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이 흔하다는 것 때문에 포도주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세상은 물없이 존재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가치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진다는 것이 가치적으로 변화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새롭게 되어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나혼인잔치에서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신 예수님이 본문에서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가나혼인잔치의 이야기와도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가나혼인잔치에서 말씀하신 '내 때'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인이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는 상황에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인자의 영광은 헬라인, 곧 이방인까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심으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셨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롭게 된 포도주가 예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은 죽어야 할 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거듭나게 되고 하늘의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임을 보여주신 기적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때가 되면 그러한 기적이 이루어질 것이고, 예수님은 그 기적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위대하심은 성도로서 증거됩니다. 하늘의 생명을 얻은 성도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증거물로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광은 새롭게 되어진 성도로써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으며 생명 없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위대한 죽음이었다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 성도로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 되어진 것은 단순히 나를 구원하시겠다는 목적때문이 아니라 너를 새롭게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겠다는 예수님의 거룩한 뜻이 담겨 있음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많은 자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게 되고 그것으로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예수님을 뵙기를 원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예수님을 뵙기를 원하는 상황이 구원의 빛이 이방인에게까지 이르러 온 세상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때는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드러나는 때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새롭게 됨을 입은 성도를 통해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되어진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만 영화롭게 하고 존귀한 분으로 여기고 그분만을 섬기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라입니다.

24절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은 곧 이것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희생할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 즉 하늘의 생명을 얻은 새롭게 된 자들이 있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의 죽음으로 맺어진 열매이기에 그들은 오직 한 알의 밀만을 바라보며 감사할 뿐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기보다는 한 알의 밀을 자랑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라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본분은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맺어진 그리스도의 열매로서 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의 피를 자랑하고 감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이 돌려지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주어진 하늘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그 생명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되어진 하늘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가를 잊지 아니하며 그 생명이 주어진 자로 산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본분을 잊지 마시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만을 따르기에 힘쓰심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