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강) 12:25-26 자기 생명과 예수님

사람에게는 누구나 무엇인가를 자기 삶의 으뜸으로 삼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돈이나 권력, 혹은 자기 체면이나 명예, 혹은 출세 아니면 자존심 등등 비록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자기 삶에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어떤 것이 있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자신을 높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질, 또는 자신의 이름, 이처럼 자신을 높여주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25-26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에게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버릴 것이고 반대로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영생하도록 보존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을 잃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서 돈이나 권력 등등을 사랑하고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사람들은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기 생명의 가치가 향상되고 지켜지고 보존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합니다. 즉 자기 생명에 가치를 두지 않고 포기하는 것만이 영생하도록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미워해야 한다면 우리 모두는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무색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고 살아있는 것을 미워하라는 이상한 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생명'은 단지 목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거나 무너질 때 그것으로 인해서 삶의 의미도 잃어버리게 되고 인생에 대해 낙심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게 하는 모든 것이 곧 자기 생명이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 영생하도록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참된 빛이시고 생명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었습니다.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예수가 생명이시며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어질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이 일은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생명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신 곳에는 죽음이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며 사람은 이 신앙으로써 예수와 함께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죽음이 없는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이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육신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신앙은 절대로 개념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명을 포함하고 있고 이 생명은 왕성하게 활동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활동은 신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에서 표현되고 현실화되는 신앙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신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시고 참된 생명이심을 깨달은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자연스런 결과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할 때 예수님이 주신 하늘의 참된 생명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생명에 가치를 두고 살아갈 때 참된 생명의 가치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잃어버리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12장에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얘기는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면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본문의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고 예수님만을 선택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고 유지하면서도 참된 생명은 잃지 않고 싶어합니다. 즉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세상대로 살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믿음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임을 모른 채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봉사와 섬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세상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섬겨주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해주면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생명은 그대로 유지하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믿고자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 정당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모른다는 것이 곧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28절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신분에 대한 세상의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섬김의 최고는 하나님이 죽으시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섬김에 보답하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뭔가 열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우리의 행위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 생명 대신에 희생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보게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는 쪽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을 선택한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 즉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해도 될 정도로 예수님의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죽음은 끝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죽으심이 곧 하나님에게 돌아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은 예수와 함께 하는 것에는 결코 끝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조차도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시작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잔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러기에 자기 생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5-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예전에 자신이 자랑거리고 여기고 사랑했던 육신의 모든 조건들에 대해서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말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고 미워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말했던 육신의 조건들을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으로 여기고 자랑했다면 바울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육신의 모든 조건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참된 생명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육신의 조건이 길이 되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 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자기 생명은 포기하게 하고 대신 예수님이 주신 참된 생명에 모든 가치를 두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결국 자기 생명을 버리고 예수님이 주신 생명에 감사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행위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얼마나 부지런히 하느냐에 의해서 섬김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김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인데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의해서 붙들리게 될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육신에 대한 희망사항들이 살아있습니다. 혹 그 희망사항들이 탐욕이 되어서 여러분을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자에게 주어진 몫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