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강) 12:27-30 아들을 영화롭게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것에 대해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과연 누가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자기 경험, 지식, 행위 등 자신의 모든 것들이 타인보다 뛰어남을 보여주고 싶어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에 자기 부인이란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인데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거꾸로 사는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거꾸로 사는 삶'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신자들에게 세상이 사는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존재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기 때문이며,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상태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미워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아버지가 귀하게 여기는 자는 예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기도 많이 하고 십일조 잘하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까? 과연 예수님이 세상에 사시면서 보여주셨던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까?

마 16:24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나를 따라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 곧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는 자기 영광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희생하면 세상이 나를 존경하겠지'라는 계산을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실 뿐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로서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 영생하도록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신 길이 어떤 길이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만이 가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서 함께 가시는 길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예수님을 섬긴다고 할 수도 있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영화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삽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은 십자가의 고통을 면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성경이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27절의 말이 어찌 보면 예수님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강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까? 실제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도 나약하셨음을 보이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그러나 뒤의 구절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27절의 말씀을 하시자 하늘에서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결국 초점은 제자들입니다. 이 때를 면하게 하여 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도, 실제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속마음을 드러내신 말씀이 아니라 무엇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은 자신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갈등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해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일 때는 갈등과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어려움에서 구원해 달라는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때를 면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28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스스로의 뜻을 포기하신 것이 결국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기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세상의 모든 일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짐을 알 것입니다.

세상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것은, 세상을 하나님 마음대로 주무르시겠다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이 존재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세상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8절)라는 말은 아버지의 뜻대로 일하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택하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것을 아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그대로 일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시는 것보다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 되어집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영광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뜻은 모두 포기하시고 오로지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한 자로 살기를 소원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는 아들을 영화롭게 할 수 없고 아들을 섬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 되게 하셔서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이 우리의 뜻, 우리의 일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믿음을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도구로 쓰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뜻을 포기하게 하는 힘이며, 자기를 미워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내가 구원받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만 생각한다면 아직 자기 욕심에 머물러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살고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구원을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목적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음이 우리의 구원만을 지향한다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 믿음의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에 존재하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면 신자는 한순간도 믿음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갈 수 없음이 자명한 것입니다.

요일 2:17절에 보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뜻은 이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정욕을 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영원히 거할 자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밖에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것에 목말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우리가 믿음을 선물로 받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는 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 둘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는 포기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믿음은 지나가는 것을 포기하게 합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한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들을 영화롭게 할 자로 세움 받았습니다. 아들을 따라감으로써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에 손해가 있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신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