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문제에서 어떤 오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의지와 결심에 의해서 믿음의 여부가 결정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쪽에서 믿기를 거부하면 안믿는 것이고 믿기를 결심하면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를 믿든 안믿든 그것은 내 마음에 달렸다고 하기도 하고 나중에 죽을 때 믿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언제든지 결심만 하면 믿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죽을 때 믿어서 천국가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오늘날 교회가 하는 전도라는 것도 고쳐야 합니다. 현대 교회가 이해하는 전도라는 것은 상대방이 예수 믿기를 결심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중심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주어지는 혜택들을 설명하면 믿음이 육신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설명함으로써 자기 육신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에 대해서 사람들은 '바빠서'라고 하기도 하고 '나중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자기 소관으로 여기고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답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부르심이며 선택입니다. 우리의 결심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은 스스로 예수 믿기를 결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함을 증거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인간은 뭐든지 자신에게 도움될만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어진다고 판단될 때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항상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믿었는데 어떤 이익을 얻었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바라보는 믿음은 처음부터 믿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믿음은 부르심이고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되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어지는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나 표적도 우리의 믿음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목격하고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게 된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사람이 어느 정도로 완악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는 놀랍고 신비로운 기적을 봤으면서도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인간이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린 것보다 더 엄청난 기적이 그에게 함께 한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되어질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깨닫고 믿을 수 없는 우리를 고쳐서 믿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에 감사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의 결과로 주어진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53:1절의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는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또 외쳐도 믿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사야 선지자가 외치는 말을 듣지 않았구나'라고만 생각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9-40절의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는 말씀을 읽어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39-40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믿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들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고침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막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벧후 3:9절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보면 하나님은 분명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본문과 같은 말은 요한만 한 것이 아닙니다. 행 28:25-27절의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라는 구절을 보면 사도 바울도 요한처럼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침 받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과연 하나님이 고침 받을 것을 막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스스로 고침 받고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으로 인해서 생명나무를 감추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천사와 화염검으로 그 길을 지키십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막으시고 계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고 눈을 멀게 하셨다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이 그 마음을 고쳐주시고 눈을 뜨게 하지 않은 이상 스스로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을 볼 수도 없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스스로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자로 증명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년 간의 공생애를 통해서 증거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3년 간 공생애를 보내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증거된 것은 누구하나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년 간의 예수님의 일이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으로 하여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면서도 믿을 것을 기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렇게 말해도 믿지 않을 자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또 42-43절에 보면 다른 말을 합니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관원 중에 믿는 자가 많았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믿기는 믿되 예수님을 바리새인들 앞에서 드러나게 말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유는 에수를 드러나게 말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출회라고 하는 불이익이 올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맞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이 더 가치있는 것인가를 판단하게 해 줍니다.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출회를 두려워 하지 않고 누구 앞에서나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는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고 말하기 전에 과연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는 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 우리의 믿음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아닌 믿음을 두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기도가 끊어질 수 없습니다. 육신을 기준으로 한다면 좋을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고 기뻐하겠지만 믿음을 두고 생각한다면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고 믿음을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믿음의 가치를 아는 신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