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강) 12:44-45 다른 하나님은 없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가르침 받기 전에 이미 자기 생각이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 가지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와 어둠의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되는 하나님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며 결국 신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과 잘못된 개념에 의해서 고안해 낸 하나님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 스스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과 비교하면 그림자에 불과하다 할 수 있지만 어쨌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사건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습니다(출 33:20).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성경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예배하고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 기준을 정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며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표준은 신에 대한 우리 상식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참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라고 해도, 설령 그가 신학자고 성경을 전문으로 공부한 목사라고 할지라도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모두 다 어둠에 속한 사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가장 명확하고 확실한 표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세상에 나타내신 자기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 생각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말하고 있으며 자신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존재로 세상에 오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은 사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대접받는 영웅의 모습으로 오셨고, 또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 편을 들어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들을 물리치셨다면 얼마든지 이해가 되고 또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으로 이해되겠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약자의 모습으로 오셨고 세상에 의해 힘없이 죽어가는 모습만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러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46절에 보면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음을 외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는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입니다. 그러한 아들을 버리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버림받아 죽는 자신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경험은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음이었습니다. 우린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행하신 일로 당연한 것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구경하는 사람일뿐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욥기서에 욥을 책망하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욥의 세친구들은 자신들을 욥의 고난과 상관이 없는 입장에서 욥을 바라봤을 뿐이지 욥의 고난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실수를 우리가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버림받음과 죽으심을 예수님이 당해야 하는 일로만 바라볼 뿐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에서 바로 나 자신의 버림받음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 자신의 죽음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 된다는 것은 겉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님은 잘 아실 것입니다. 혹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둠에 속한 생각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몸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겉모습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좋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수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개입하시는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활동과 사도들의 활동이 보일 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개입하시고 역사 하시는 것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서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까?

그러면 한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누가 일하신 결과입니까?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누가 일하신 결과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일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보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봄으로써 예수님에게 일하신 하나님을 볼 수가 있고, 바로 그분이 참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을 위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괴로움과 고통이 있을 때 해결해주시는 것을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에게서 보여지는 하나님은 아들을 버리신 분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님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세상은 하나님은 분명 예수님 편이 아님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자기들 상식으로는 하나님은 아들을 버리는 그런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기들의 손에 의해서 힘없이 죽는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살아나셨습니다.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 편이라는 것이 증거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죽어야 할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존재임을 예수님을 버리심으로써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버림받음을 보면서 ‘하나님 내가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나를 버리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면 그가 바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진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방인들은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자신들만은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신자가 누구겠습니까? 교회 잘다니고 돈 많이 내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께 나올 것을 요구하시고 또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교회를 많이 세우고 크게 부흥시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25절에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을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줬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이것이 너희들 운명이다’는 것을 외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히 사단의 권세 아래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운명인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의 부활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란 예수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버림받은 경험이 있을 때 버림받아 마땅한 자가 예수님의 피로써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구원의 길을 가는 참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