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강) 13:1-11 끝까지 사랑하심

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고 계십니다. 자기 사람이라는 것은 즉 자기 사람이 아닌 자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요 3: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 6:39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인데 아버지의 뜻이 뭔가 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사람을 구분하고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0:26절에서도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도 자기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겸손으로 이해합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 것이기 때문에 높은 자이면서도 낮은 자를 섬기는 겸손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살아가자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같은 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1절에서 말하는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는 가려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에 충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서는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이것이 내가 너희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4절부터 보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의 순서가 되자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라고 하면서 사양을 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예수님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제자인데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 마땅한데 어떻게 높으신 분이 낮은 우리를 섬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질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도덕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발씻기를 사양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9절)라는 말을 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발만 씻는 것보다 손과 머리까지 씻으면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가 되어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은 발만 씻어주었지만 만약 나를 손과 머리까지 씻어주신다면 저들보다 내가 더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가 되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품었는지도 모릅니다. 즉 다른 제자보다 자기가 예수님께 더 가까운 관계가 되고 싶어한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과 더 가깝다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한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목사에 대해서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교인들보다 목사와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는 우리 집은 한번 심방 왔는데 저 집은 두 번 심방 갔다는 것으로도 서로 신경전을 펼친다고도 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목사와 가까운가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과 가까운 자로 살아가는가?'를 생각하라고 외쳐주고 싶습니다. 목사와 가깝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목사를 바라보는지 답답할 뿐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쓸데없는 경쟁에 힘을 소비합니다. '나는 하는 일이 잘됐는데 너는 실패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는 사랑하지만 너는 사랑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세상 것을 가지고 사랑을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 판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믿음이 없는 불신앙이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손과 머리까지 씻어 달라는 베드로에 말에 대해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절)는 말씀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발만 더럽기 때문에 발만 씻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이 더럽기 때문에 씻어준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온 몸이 깨끗하다는 말을 하십니다. 온 몸이 깨끗하다는 것은 발까지 포함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즉 발도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발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러워졌기 때문에 씻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세상을 사느라고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대로 하면 목욕했다는 것은 곧 온 몸이 깨끗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대로 하자면 온 몸이 깨끗하기 때문에 발도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몸이 깨끗하다고 해도 발은 씻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과 연관이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시는 것은 더러운 발을 깨끗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욕을 해서 온 몸이 깨끗하다는 것은 더러운 자와 구분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더럽습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자가 더러운 존재입니다. 더럽다는 것은 어디에 속한 존재인가를 두고 판단합니다. 행동이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더럽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권세에 속한 자면 더러운 것이고, 주님의 권세에 속한 자면 깨끗한 것입니다. 내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했다는 그것만으로 더러운 존재에서 깨끗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하다는 것은 우리의 행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깨끗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힘쓴다는 것도 성경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깨끗함은 주님에 의해서 되어진 은총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신 예수님의 의로우신 피가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몸이 깨끗한 자로 목욕한자로 일컬음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끗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곧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더러운 우리를 불러주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발을 씻어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발을 씻기시는 것은 목욕한 네가 다시 더러움에 빠지지 않도록 내가 널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말합니다. 왜 난데없이 유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까? 그것은 유다와 다른 제자들을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다와 다른 제자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는 것은 유다의 생각자체가 마귀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예수도 팔아버리는 것이 마귀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각이 유다만의 것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유다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유다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예수보다는 내 삶이 소중하고 내 이익을 위한 일이라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포기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 아닙니까?

그러나 유다와 다른 점은 유다는 주님의 사랑안에 거한 자가 아니었고 다른 제자는 주님의 사랑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와 달리 다른 제자는 항상 주님의 사랑이 그들을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유다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붙들어서 주님의 은혜안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는 항상 사단의 유혹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내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자기 한 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의 믿음에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모든 것이 주님 덕분이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믿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힘과 착함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오늘도 나를 주님안에 붙들어 놓았다는 고백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일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의지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