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강) 13:4-11 발을 씻음

여러분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막상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려고 하면 그동안 많이 말했고 잘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쉽게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명해봐야 남을 도와주는 것,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등으로 말하는 것이 전부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시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좋아하시려면 사람들 모두를 좋아해주시는 것이 옳고 어려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은데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역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일을 도와주고 세상을 잘 살아가게 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들에게 있는 욕망에서 나오는 사랑일 뿐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일이 잘될 때에는 하나님을 부르다가 실패하고 무너지면 당장 원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사랑이냐?'고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랑하시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더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지옥 갈 사람을 건지시는 것이 사랑이라면 누구는 지옥가지 않게 하고 누구는 지옥에 가도록 버려두시는 것이 과연 사랑입니까?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 즉 끝없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과연 끝까지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해서 결혼하여 부부로 살아가는 인간관계에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변함없이 계속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분에 대해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든 상관없이 처음의 사랑이 변치않고 계속되는 것이 끝없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 끝없는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관계라해도 때때로 미움이 나오고 싸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싸우고 다시 화해하고, 미워했다가 다시 미움이 사라지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사랑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조금만 섭섭하게 하면 미움이 나오고 싸움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한번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면 어떤 일로 인해서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행함이 보여지든 그 행함으로 인해서 주님의 사랑이 나에게서 떠날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악용하여 자기 멋대로 행하고 살아간다면 그것 자체로서 주님의 사랑에 거하지 아니한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어쨌든 우리의 행함 때문에 우릴 사랑하던 주님이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예수님의 행위에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 행위란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끝없는 사랑이 무엇인가가 밝혀지는 것입니다.

당시 풍습대로 하자면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도리며 윤리고 질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세상 질서를 무너뜨리시고 오히려 거꾸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이처럼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으로 사랑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죄를 씻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죄를 씻어준다는 의미로 발을 씻기고 계신다면 베드로가 말한대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 씻어주시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하여 온 몸이 깨끗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 역시 온 몸이 깨끗하지만 발만 더럽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발을 씻어주시는 것은 더러운 발을 씻어주신 의미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으시는 것은, '네가 세상에 나가 놀다가 발이 더러워졌으니까 발을 씻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네가 나와의 관계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너는 이미 온 몸이 깨끗한 사람이다'는 것을 표현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온 몸이 깨끗하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관계로 인해서 그리스도 덕분에 깨끗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지 우리가 죄를 극복할 수 있거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몸이 깨끗하다면 더럽지가 않다는 뜻인데, 성경이 세상을 더럽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죽이고 강도 짓을 하는 그런 나쁜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더러운 것입니까? 성경이 세상을 더럽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을 사랑하며 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죄고 죄는 곧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이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온 몸이 깨끗하여 졌다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실 때는 악한 것이고 더러운 것이라면 온 몸이 깨끗하게 된 존재라면 그런 더러움이 없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갈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며 산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의미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온 몸이 깨끗하다는 말씀은 '너희를 깨끗하게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깨끗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해라'는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면서 지은 죄를 씻어주심으로써 깨끗함을 유지하게 하겠다는 뜻도 아닌 것입니다.

온 몸이 깨끗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깨끗함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용서안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용서란 이제부터 죄를 안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다 갚으셨으니까 우리의 죄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를 이미 용서의 은혜안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면 용서가 되고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용서해 달라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용서를 구해야 용서가 된다고 여기고 용서를 구하기 위한 회개라는 것을 한다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회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이미 온 몸이 깨끗하게 되어진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총입니다. 우리가 요구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이러한 은총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이미 용서라는 은총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용서라는 것이 우리가 부탁하고 요청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란 이미 용서의 은총안에 거하고 있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기시는 것은 날마다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란 그리스도와의 관계안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 자체가 용서의 은총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힘으로 그리스도안에 거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깨끗함을 입은 것, 용서함을 받은 것, 모두가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러한 은총에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유는 '너희는 너희의 힘으로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보고 십자가에 죽으신 주를 사랑하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으면 아마 제자들보고 예수님의 발을 씻기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은 제자들은 결코 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이 이루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약하지 않은 존재라면 예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우리보고 지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해줄 것은 다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너희가 너희를 책임지고 살아가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우리가 지켜야 할 몫으로 남기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끝까지 책임지실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배반할 것을 알지만 그러한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없는 사랑이고 이것을 발을 씻어줌으로써 보이시는 것입니다. 물론 가룟유다는 예외입니다. 그는 택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게 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은총을 생각하며 주님만 자랑하며 사는 것이 신자의 본분인 것입니다. 주님만 자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