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강) 13:21-30 가룟 유다

본문에 나오는 가룟 유다는 아마 기독교에서는 가장 나쁜 사람으로 치부될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팔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질과 침뱉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을 가룟 유다보다 나은 사람의 위치에 두고 가룟 유다를 욕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나는 가룟 유다가 아니다'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를 욕하는 것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 것은 단지 가룟 유다를 성토하고 그의 악한 계획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을 보면서 과연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대해 말씀하시는 의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을 때 이미 그것을 아시고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팔려고 생각하지 아니한 제자들은 깨끗하고 예수를 팔려고 생각한 유다는 더럽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유다와 예수님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1절에서 말씀하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자 제자들은 서로를 보면서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의심을 하게 됩니다(22절). 아마 그들은 '나는 분명 아닌데 과연 누구를 두고 하신 말씀인가?'라는 생각으로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해 의심하면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나름대로 짐작해 보지 않았겠습니까?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분명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저마다 자신에 대해 '나는 아니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서 깊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도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를 팔 생각이 전혀 없지만, 알 수 없는 상황과 형편에 의해서 얼마든지 생각이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니다' '나는 괜찮다'라는 생각이 굳어 있다 보니까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실수와 허물을 꼬집고 드러내는 것이 앞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비판이라는 행동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의 실수와 허물에서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비판은 상대방의 허물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보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에게 있는 허물이 나에게도 있을 수 있는 허물로 여겨진다면 그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 앞서기보다는 자신도 그와 같이 허물 많은 자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를 판단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이 말씀을 들었을 때 서로 보며 의심하더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니다'는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에 대한 이야기 뒤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제자도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돈이든 무엇이든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 역시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담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빠지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은 자신에 대해서 장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굳은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분의 생각과 장담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의 생각과 장담은 상황과 형편에 의해서 수시로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연약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은 유다 한 사람을 책망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도 베드로 한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 언급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를 내세워서, 그리고 베드로를 내세워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보이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이심으로써 우리 스스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연약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몫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담당해 주실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끝까지 사랑하심입니다.

그런데 26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제자가 '주여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왜 한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계획을 폭로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냥 '가룟 유다가 나를 팔 사람이다'고 말씀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한조각을 찍어다가 주시는 행동을 하심으로써 유다를 지목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유다를 내세워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인가를 가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한조각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찍어 주신 한조각이란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유월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무교병을 먹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찍어주는 한 조각이란 무교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살아났음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통해서 유월절의 의미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자신을 상징하는 떡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너무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한조각을 찍어서 준다면 그것은 '바로 네가 나를 팔 사람이다'는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참된 제자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 내가 바로 예수님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한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태도로 나오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참된 제자들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30절에 보면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버립니다. 결국 유다는 네가 나를 팔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선언 앞에서 피해버리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한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27절에 보면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한 것은 이미 2절에서 사단이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유다의 생각은 사단에게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27절에서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사단이 들어 있는데 또 다른 사단이 들어갔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사단이 들어갔다가 잠시 나왔는데 다시 들어갔다는 뜻입니까?

여기서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사단이라는 존재는 사람의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사람에게 들락날락 한다면 사단이 들어갔을 때는 죄를 짓는 악한 사람이 되고 사단이 나왔을 때는 죄를 짓지 않는 선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입니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날 대부터 사단의 자식으로 납니다. 사단의 자식도 하나님의 자식도 아니었다가 사단이 들어오면 사단의 자식이 되고 성령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사단의 자식이었다가 하나님의 택한 자는 사단의 세력에서 구출되고 하나님의 자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은 가룟 유다의 행동이 곧 사단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유다의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떡조각을 받고 나가버린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유다가 망한 이유는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떡조각을 주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가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멸망받아야 할 죄인임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유다에게 떡조각을 주시면서 '네가 날 팔 자다'고 선언하시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너희가 멸망받아야 할 죄인이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한다면 그것은 유다와 같은 사단의 사고방식일 수밖에 없고, 참된 제자라면 예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만 삽니다'라는 고백으로 주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제자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30절에 유다가 나가니 밤이러라고 말하는 것도 물론 그 시간이 밤이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유다와 같은 상태가 곧 밤, 어둠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앞에서 자신의 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어둠인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부지런히 살피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담은 참된 제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