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강) 13:33-35 새계명

유다가 예수님을 돈을 받고 제사장들에게 넘긴 사건은 유다라는 한 개인의 부도덕한 행위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유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유다만 보지말고 유다를 통해서 보여지는 사단의 계략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예수님에게서 떡 조각을 받고 나갔다고 되어 있는데, 유다의 그같은 행위에는 사단이 개입되어 있음을 본문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7절의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는 말을 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유다의 행위에 대해서 사단이 개입된 것으로 언급하는 것은, 유다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해 질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사단이 공격하는 하나의 싸움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유다를 내세워서 예수님을 판 것이 사단의 생각이라면 과연 사단은 어떤 결과를 목적하고 예수님을 팔도록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유다를 내세워서 예수님을 팔게 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결국 사단이 목적한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그러다가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사단의 일이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합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사단에 의해서 되어진 결과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단이 예수님을 팔도록 한 목적이 예수님을 죽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단의 목적과 하나님의 계획이 일치되는 모순이 있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가 해결되고 생명을 얻게 되는데 사단이 그것을 도울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사단은 예수님을 팔게 하고 십자가의 죽음의 위기까지 몰고 감으로써 달리 노리는 것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시했던 것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과,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과,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줄테니까 나에게 경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이 제시한 이 세 가지 시험은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결국 사단은 예수님이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시험을 했던 것입니다. 먹을 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자신의 능력과 힘을 보여주고,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에든지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고방식의 삶으로 이끌어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세상에 오신 구세주는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고, 힘있는 자가 제일이라는 것이 진리가 되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시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한다는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말씀보다는 떡이 먼저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만 천국을 위해 말씀을 붙드는 형식을 취할 뿐입니다. 하나님께만 경배한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부처에게 절하지 않고 제사 안지내면 되는 것으로 인식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는 도움이 되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다스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단이 예수님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 넣어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아마 죽지 않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자 할 것입니다. 설사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내가 죽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인가?'라고 반발하면서 살기 위해서 힘을 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은 죽으시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러한 예수님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 넣어서 죽음을 거부하는 메시아로 보여지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선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역시 구세주는 나를 살리고 나를 도와주는 분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의 위기에서 천사를 동원하고 하늘의 권세를 동원해서 멋있게 죽음에서 탈출하는 모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구세주는 힘과 능력으로 다스리는 분으로 오해하도록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목적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뜻에 그대로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죽으심조차도 거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심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나간 뒤에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유다가 나간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곧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상이 볼 때는 실패하는 것이고 불행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고난과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이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사단과의 싸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고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광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영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는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부활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에게 있어서 영광이라는 것도 절대로 이 세상의 것과는 철저하게 무관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것에 영광을 얻으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생각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히 부활한 자로 생명을 누리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뒤에 예수님은 33절에서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에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가신 곳과 우리가 사는 곳은 우리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전혀 다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힘으로 갈 수 없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그곳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으로 생각하고, 목표로 삼고 평생을 추구하며 사는 것들이 예수님이 가신 곳에서는 모두 거부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소망하고 추구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스스로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욕망의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이 가신 곳에는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장에 보면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은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성령을 우리로 하여금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이나 주는 존재로 인식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스스로 길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는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34-35절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34-35절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 계명이라고 하면 구약에는 없고 신약에만 있는 새로운 법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 계명은 구약, 새 계명은 신약이라고 단순히 구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계명과 옛 계명은 내용의 변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 계명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구약의 정신입니다. 구약의 중심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리고 레위기에서는 이웃을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새 계명이라고 해서 내용이 구약에 없는 새로운 계명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로마서에 보면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사랑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도 사랑할 수 없는 죄를 깨닫게 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하라는 계명 앞에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능한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 계명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시겠다는 말씀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은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그 사랑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그것으로 내 제자인줄 알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사랑이 신자를 통해서 보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이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줄기가 되고 우리는 가지가 되어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가지인 우리에게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스스로의 열심으로 열매를 맺고자 하였지만 신약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살리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어떤 이웃이든 여러분 자신과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권세도 돈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느냐? 는 것만 요구될 뿐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이웃과 자신을 다르게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겨우 내가 좋아하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친분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불쌍하게 여기게 합니다. 나를 불쌍한 자로 볼 수 있기에 이웃도 불쌍한 자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영원히 죽어야 할 인생이 바로 우리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죄도 우리를 해치 못하는 안전한 곳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안에 있으니 사랑이 맺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열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증거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전달자입니다. 그런데 내가 받은 것이 없으면 전달 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는 일이 잘되는 것에서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지 마시고, 영원한 사망에 처한 여러분의 본질에서 은혜와 사랑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에게서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