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강) 13:36-38 주님의 사랑

본문은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베드로에게 있었던 유명한 사건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후회스럽고 안타까운 사건을 꼽으라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론가 가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어디로 가시는지를 묻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의도로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나의 가는 곳에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예수님의 답변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베드로의 자신만만한 장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베드로의 장담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베드로의 평소 믿음이 좋지 않았고, 베드로의 사람됨이 큰소리만 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믿지 않아서였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사람을 구분하시고 평가하셨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베드로 개인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러한 자질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베드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한번 해본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베드로는 그럴 마음이 있었고 또 자신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주님을 따라갈 자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의 자신감과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신감이나 의지는 항상 상황이나 형편에 의해서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아무런 위험과 어려움이 없을 때는,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음먹었다가도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자신도 모르고 원망이 일어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능력이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의 것, 즉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을 가진 자만이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는 길로 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베드로에게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몰랐습니다. 그저 자신의 사랑으로 주님을 따라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담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따를 수 없는데 어떻게 후에는 따를 수가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후'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가져오셨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이 신자로 하여금 주님만을 섬기게 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까지라도 주님을 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후에는 나의 사랑이 너희를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나를 따르게 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라는 한 개인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힘에 의해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답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함께 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의해서 주님을 따라가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신앙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지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의 믿음이나 의지로 주님에게 순종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고 다짐하고 '믿겠다'고 작정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능력자는 주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무능력한 자로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의지와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나 생각은 언제나 상황과 형편에 의해서 흔들리고 변하고 바뀐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편안할 때의 우리 마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만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은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육신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앞에는 새계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문제인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리기를 새계명과 옛계명의 내용이 다르지가 않다고 탖습니다. 다만 다른 점은 옛계명은 인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법을 이룰 것을 요구하고 있고 새계명은 하나님의 법을 이루신 주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옛계명은 인간의 사랑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진다는 것이 새계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너희들의 힘으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자로 만들겠다는 선포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행하는 자로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피흘리고 죽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왔을 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과 베드로가 생각하는 생명의 질이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생명은 우리의 생명을 버리고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베드로가 그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죽더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말은 했지만 막상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와졌을 때 예수님보다 자신이 더 소중히 여겨진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성령이 왔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루어주신 하늘의 생명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이루어진 하늘의 생명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는다고 해도 하늘의 생명을 얻었다는 것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신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부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처럼 부요한 자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신자의 부요함을 증거하지를 못합니다. 세상처럼 세상 것을 가지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만 보여집니다. 이것이 신자의 나약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말씀은 연약한 우리에게는 함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되지만 주님이 이루시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소원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함께 하신 성령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할 때 그 사랑에 깊이 빠지고 매이게 될 것을 소원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이 하는 것은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은 억지이기 때문에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줬는데 그것을 몰라줄 때 섭섭함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행한 자는 남의 도와줬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같은 자가 남을 돕고 섬길 수 있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실천하라'고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이 그 사람을 행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행함은 곧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았기에 자기 행함을 의지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