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갑자기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다면 앞에서 제자들이 뭔가 근심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사실 앞의 내용에서는 제자들이 무슨 일로 인하여 근심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13장이 끝나고 14장이 새롭게 시작되니까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애당초 성경은 장 절의 구분이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번역하면서 장 절로 구분을 하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14장이니까 새로운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틀린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지금 제자들이 근심을 하고 있기 때문에 권면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앞으로 제자들에게 닥칠 상황이 지금의 제자들로서는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근심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제자들에게 닥칠 상황이란 어떤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실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제자들에게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을 이해하자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부터 생각해봐야 합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많은 군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왕을 영접하는 것 같은 영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뒤를 제자들이 따라가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역시 예수님은 우리들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즉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더욱 굳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기적을 베푸는 그런 분이 자기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분명 제자들에게는 큰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지하고 신뢰한 예수님이 그들 곁을 떠나 버리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뢰하던 대상이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될 대, 자기들의 곁을 떠났다고 여겨질 때 그들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서 걱정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뢰하던 분이 없으니까 이제는 모든 것을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심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근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 어떤 어려움에 빠져서 근심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잘 되겠지 뭐, 희망을 가져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근심이 사라지고 희망이 생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만한 힘있는 사람이 와서 '걱정마라 네 문제는 내가 다 해결해 줄께'라고 한다면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만한 사람이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하실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근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근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오늘 우리들의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치고 근심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마음에 근심과 걱정거리를 한아름씩 안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형편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말하면 근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점을 기억하시고 오늘의 말씀을 살펴본다면 근심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냥 '나를 믿으라'고 하실 수도 있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도 믿고 나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과 나를 믿는 것이 결코 다르지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에 대해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고통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믿었던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서 지금의 우리들을 해방시키고 세상에서 으뜸가는 나라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그들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안겨줄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행복하게 해줄 메시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메시아가 자신들을 떠나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는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는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메시아를 보낼 것이라는 약속은 없습니다. 그러니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그들의 전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떠난다면 이제 그들에게는 믿어야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소망으로 살았는데, 오신 메시아가 가버린다면 무슨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까? 그러기에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것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처소를 에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고 합니다. 즉 지금은 가시지만 다 제자들을 위해서고 가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예수님이 게신 곳에 영원히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자들은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자기들 곁에서 자신들을 챙겨주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영원히 함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믿음으로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즉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던 것처럼 다시 온다는 나의 약속을 믿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하시기 위한 길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길 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임을 알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예수님이 오실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세상일을 챙겨주기를 기대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기대를 가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보다 세상일에 더 마음을 두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근심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백성된 자들이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육신의 눈으로 예수를 보고 만났지만 이제는 마음의 눈, 심령으로 예수님을 보게 되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풍랑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제자들은 풍랑 때문에 죽을 것만 두려워했지 예수님이 풍랑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나의 풍랑을 잠잠케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풍랑도 다스리는 분이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 내가 겪는 이 일이 전부가 아니고 끝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풍랑속에서도 주님이 잠잠하시다면 주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나를 예수님이 계신 것에 영원히 있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고 계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믿기에 풍랑에서도 근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능력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는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거처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이것을 굳게 하시고 이 소망으로 힘있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