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지 초자연적인 이적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본문의 내용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적들이 초자연적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기능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적의 사건을 대할 때 이적 자체에 매료되기보다는 이적의 사건 자체가 말해주고 있는 예수님의 계시에 관심에 기울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을 이유로 본문을 결혼식과 연관해서 생각을 한다거나, 물이라는 하찮은 것이 포도주라는 귀한 것으로 변화된 축복의 사건이라는 생각으로 이해를 하려고 한다면 본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깊은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을 이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이적을 이적으로 말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말씀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표적이란 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장차 되어질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역시 신비한 이적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되어질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기 위한 이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사건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표적입니까? 본문에서 표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구절은 4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는 이 말씀이 예수님이 장차 되어질 어떤 일을 계시하기 위해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을 표적으로 행하셨는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먼저 이 구절에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표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구절에 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거기에 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잔치에 청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친도 있고 예수님도 청함을 받은 것은 잔치 집이 예수님의 친척집이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지만,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의 친척집인가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사실 여부에 관심 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게 되고, 예수님의 모친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포도주가 없음을 말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혼인 잔치는 아주 특별한 기쁨의 잔치입니다. 그리고 이 잔치는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간 계속되는 잔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의 잔치에서 아주 중요한 포도주는 넉넉히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계속되는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면 그 잔치는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잔치는 엉망이 되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참으로 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포도주가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모친은 이 위기의 상황을 예수님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많이 목격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진 위기의 상황도 예수님이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친에게 예수님은 우리가 듣기에는 참으로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것이 위기의 상황을 말하는 모친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이었던 것입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듣기에는 '포도주가 떨어진 이 상황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뒤에 예수님이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구절은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위기 상황을 말하는 모친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모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모친과의 관계를 끊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혈육의 관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말라는 의미로 하신 것입니다. 혈육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은 마리아에게는 다만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신비한 힘을 가진 아들로 비춰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35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땅에서의 혈육의 관계로서 사람들을 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관계로서 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육신의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혈육적인 관계는 구원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육신으로 예수님의 모친이라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피 흘리심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입었다는 것을 아는 자가 곧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게 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단지 아들로만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아들로만 안다면 자기 백성을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 문제 때문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나 해결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붙들고 있는 어둠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관계는 오직 죄문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이 아니면 해결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비로소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아들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고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는 예수로만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에게서 구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에서의 여러 상황에 대해서는 참으로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조금이라도 힘든 상황이 발생하면 예수님을 찾으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참지를 못하고 '주여'하면서도 장차 닥칠 보이지 않는 세상의 위기 상황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둔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되고,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 모두가 영원한 고통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불신자들은 모를 수밖에 없다 해도 소위 심판을 말하는 신자들조차도 관심을 두지 않고 둔감한 반응으로 살아간다면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것처럼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어린양이십니다. 때문에 어린양과의 관계에 있기 위해서는 필히 어둠이 권세 아래 있는 우리 자신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둠의 권세, 즉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고 항상 세상에서 남들보다 못나고 부족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신만 보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를 좋은 상황으로 인도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아직 이르지 아니한 예수님의 때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33절에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장차 오실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곧 그분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는 곧 구원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구세주로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의 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라는 것은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세상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즉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양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은 십자가 사건에서 분명하게 계시됩니다. 이 때를 '내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 바로 예수님이 일하실 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바로 포도주가 떨어져서 잔치가 엉망이 될 이 때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생각하는 때이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때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일하실 때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때 예수님이 나서서 일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때일 뿐이지 예수님의 때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4절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이해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은 포도주가 없는 위기의 상황을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자신은 포도주가 없는 상황이나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큰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하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시기도 하셨지만, 우리들의 삶에서의 어려운 문제들도 해결해주시는 분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포도주를 만드셨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끝까지 자기 일에 대해서 관심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자기 문제를 들고 나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던가를 생각한다면 십자가와 자기 문제를 결코 함께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 문제에 대한 염려를 벗어버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예수님의 일에는 십자가도 있지만, 우리들의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문제의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믿음 없음으로 한탄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찾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만을 마음에 둔 신자의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포도주를 만드신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5절에 보면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마리아는 아직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내 때'를 십자가의 고난으로 보지 못하고,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할 때로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때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성취하는 때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때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때 마침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그것이 곧 포도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연회장은 물로된 포도주를 맛보고 좋은 포도주로 인해서 잔치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있었다는 것은, 마가복음 7:3절의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라는 말씀대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기 위한 규례 때문에 준비된 항아리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는 것은 정결함을 위한 유대인의 결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은 손을 씻는다고 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성취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가 성취되었을 때 자기 백성에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정결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한 정결 의식 또한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하기 위해서 정결함을 위해서 준비된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셔서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은 단지 포도주가 없는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의도라면 '내 때'를 말씀하실 이유가 없이 즉시 포도주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사건에 대해서 표적이라는 말도 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이 처음 표적'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문을 표적의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장차 되어질 어떤 일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일으키신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순히 잔치가 엉망이 될 수 있는 위기 상황을 해결해주신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기 전에 '내 때'를 말씀하신 것은 포도주를 만드셔서 나누어주시는 일을 단지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보지말고 예수님의 때인 십자가의 고난의 차원에서 이해하라는 의도이십니다. 그래서 표적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나누어주심으로서 잔치 집에 큰 기쁨을 주시는 것처럼 십자가의 고난이 성취될 때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이 나누어지고 결국 참된 기쁨을 얻게 될 것을 계시하시는 표적인 것입니다.
11절에 이 표적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표적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십자가 고난의 성취로 인해서 증거 되어질 그리스도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세상에 신비한 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로 성취되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 그리스도가 보여주시는 표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믿으면 너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표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때가 성취됨으로 인해서 성령이 오시고 그로 말미암아 죄악으로 더러워진 우리가 깨끗함을 입게 된다'는 표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참된 관계에 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는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이상 우리가 어떤 요구를 한다고 해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거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때를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라면 눈에 보이는 포도주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나누어 졌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서 사망에 처한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주어졌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포도주에 마음을 두고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결국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자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씀이 혹시 십자가의 은혜보다는 삶에 마음에 두고 예수님을 찾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는 말씀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