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강) 14:18-24 버려두지 아니함

성경은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전에 한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다른 믿음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믿음이라고 해서 다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도 구원의 능력이 되는 참된 믿음이 있고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이 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생각을 전혀 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여기고 평생 그 믿음으로 살았을 때의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믿음에 대해 점검할 필요성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내 믿음은 가짜가 아니다'라는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일에 대해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고 뭔가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잘못된 착각을 가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자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주어지는 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아무런 조건없이 자기 백성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선물인지 아니면 여러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인지는 분명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다 똑같다거나 대강 믿으면 된다거나 교회 잘다니는 것이 믿음이라는 등의 생각은 버리십시오. 그러한 생각들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믿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믿음인가?'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결국 이것을 위해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 참된 믿음의 실체에 대해 배우고 우리의 믿음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먼저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합니다. 우린 이 구절에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을 합니다. 고아라는 것은 말 그대로 부모가 없는 아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모가 없다고 해서 무조건 고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장성한 사람은 비록 부모가 없다고 해도 고아라고 말하지 않지 않습니까? 장성한 사람에게는 부모가 없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게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해서 돈을 벌고 먹고 살아갈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일할 능력이 없는 아이에게는 부모가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의지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런 고아의 상태로 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어른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연령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마치 부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는 어린아이로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는다는 말씀은 '너희들은 내가 돌봐주고 지켜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어린아이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바로 이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시는 제자들의 상태라면 오늘 우리 역시 동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면 우리 자신은 제자들보다 더 나약하고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전혀 살아갈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나는 힘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힘이 있는 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부분이 소홀해져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믿음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나약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아와 같은 그런 존재임을 말씀하는데 정작 우리 자신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있는 것입니다. 내가 알아서 교회도 잘 다닐 수가 있고,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 믿음은 내가 알아서 지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신자는 고아가 아니라 장성한 자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아 도와달라고 할 뿐이지 생활에 별 문제가 없으면 도와 달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계에 대한 문제에서 모든 사람은 고아가 아니라 어른으로 살아갑니다. 내 생계는 내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어른 의식이 신앙에서도 그대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기 나름이고 마음먹기 나름이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즉 뭐든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결단을 하지 않고 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지 하려고 하기만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른의식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현대 교회는 신앙으로 사는 것을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 그리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 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믿음을 그렇게 허술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21절에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합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 마음은 사랑하는 자로 살고 싶어하지만 우리 안에 다른 무엇인가가 그런 마음을 막고 훼방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신자라면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 그렇게 살고자 원하는 것이 신자다운 생각일 것입니다. 이웃에 대해서도 같습니다. 이웃을 미워하며 살고 싶어하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말씀대로 희생하며 섬기며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나약함은 사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은 고아와 같이 나약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해서 아버지와 함께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아버지와 거처를 함께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거처를 함께 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살아갈 뿐이지 자신은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인간은 그럴 존재가 못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여전히 자기 사랑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일에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것이 인간이기에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내시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의를 포기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자는 성령이 오심으로서 세상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게 해달라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가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