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강) 14:25-31 신자와 성령

성경을 얘기할 때 힘든 것은 성경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느냐 입니다. 하지만 제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제 자신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마나 성경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힘들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성경을 보면서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가 맞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저의 성경 해석에 대해 틀리다고 생각하면서 설교를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들의 성경 해석도 존중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해석을 존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해석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인가는 분명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위한 해석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 해석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어떤 성경 해석을 대한다 할지라도 '이 해석이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는가?'를 살피는 자세만큼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에 대한 얘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령이란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신비스런 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을 우리 멋대로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대개 사람들은 성령이 오면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물론 성령이 오시게 되면 능력이 생기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26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들었던 말씀을 잊고 있었는데 성령이 오셔서 기억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그것이 진리인줄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에 소홀히 여기고 마음에서 지워버렸는데, 성령이 오심으로써 그 말씀이 진리며 생명인 것을 알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누구든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는 자로 산다면 그가 곧 성령이 함께한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은 보이는 세계에 미련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오신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이는 세상의 개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 없는 세상에 대해 소망을 둔다는 것이 헛된 것을 쫓아가는 미련한 짓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슨 뜻이었던가 알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신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함께 하셔봐야 여러분이 원하고 필요로 한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십니다. 성령은 성령이 하실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시면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도 주시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신다면 그것은 성령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실 일은 정해져 있습니다. 성령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 뜻대로 세상을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심 받은 성령께서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분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아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 그것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그 사람은 세상의 일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피를 찾지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겠다는 것은 우리는 무지한 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1+1=2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성령이 오셨다면 누구에게 성령이 필요하겠습니까? 분명 1+1=2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면 그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상식과 틀에서부터 시작할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시는 말씀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분명 불신자와는 다른 사람을 살고 있습니다. 행위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신 자로 산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자로 산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성령안에서 사는 삶은 결코 물질적인 복과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나의 삶에서 맛볼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도,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보다도 세상의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사는 것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크나큰 복을 땅에 묻어버린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인에게 한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 버립니다. 종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이 적게 받은 것에 대한 불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한달란트처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섯 달란트 두달란트를 받았는데 나만 겨우 한달란트를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은 세상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세상이 크게 보인다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보잘 것 없이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심으로 주어진 생명되시는 그리스도는 세상무엇보다도 큰 선물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