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 포도나무와 가지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하나님은 농부로, 신자는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는데 왜 ‘참 포도나무’라고 하실까요? 그냥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참 포도나무라고 하시는 것은 다른 포도나무와 비교하기 위해서임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포도나무로 비유되는 것이 예수님뿐이라면 굳이 참 포도나무라는 말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포도나무이면서도 참되지 못한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것과 비교하기 위해서 ‘참포도나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포도나무를 염두에 두시고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예레미야서 2:21절에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은 귀한 포도나무라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방인을 악하다고 말할 때는 그들의 행동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살인을 많이 하거나, 도적질만 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이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그것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는 말로서 이방인의 악함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방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처럼 살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화를 위해 살아가고 자기 영광을 얻기 위해서 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서 보여진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들의 열심과 부지런함으로 하나님을 자기들의 편으로 붙들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심을 아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붙드는 힘을 신앙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열심히 지키고 행하는 것이 신앙이었으며 하지 않은 것은 게으른 것이고 신앙이 아닌 것으로 평가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떤 행위가 있게 되면 그 모든 것은 열심히 행한 자기들의 공로로 돌렸던 것이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으신 귀한 포도나무로 살아가는데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것은 세상 그 누구도 포도나무로 살아갈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실체임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4-6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인간은 실패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은 열매를 맺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열매를 맺어내는 가지가 되라고 독촉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모아다가 자기만 천국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천국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농부로 비유하십니다. 농부는 나무를 가꾸고 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가꾸고 기른다는 것입니까? 분명 이것은 이상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농부란 가꾸고 기른다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열매를 기다리고 원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가꾸고 기르는 것에 대해 가르치기 보다는 열매에 대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열매를 맺어서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봉사 헌금 등등의 행위라는 것을 열매로 생각하고 그것을 맺어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야 말로 이방 포도나무의 가지로 살아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매는 맺는 일에 실패할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자연히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가지는 다만 나무에 붙어있음으로서 나무에 의해 열매가 맺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 접붙이셨습니다. 따라서 접붙임 받은 가지답게 사는 것은 내 스스로 열매를 맺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예수님으로 되어질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안에 있으면 주님에 의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자연히 주님의 것이 열매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열매로든 오직 주님만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지가 된 것, 이것이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