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기도의 기쁨

마태복음 6:31-32절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생각하면서 항상 이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분명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가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에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은 이미 나에게 충족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위해 따로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많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기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필요한 것들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사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는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줄 다른 것을 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생활한다면, 그렇다면 그곳에서 기도할 때 과연 어떤 기도가 나와지겠습니까? 지금처럼 자식들이 공부 잘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아프리카와 같은 곳에서는 그러한 기도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 없는 말일 것입니다. 그곳이야 말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또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곳에서의 기도는 이미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서 이 말씀을 생각하면 기도에 대한 무한한 꿈과 소망을 안겨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은 마치 우리에게 알라딘의 마술 램프 하나를 안겨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도 할 것입니다. 램프를 문지르면 램프의 요정이 나와서 ‘주인님 뭐든지 말씀하십시오.’라고 하는 것처럼 기도를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 얻을 수 있는 통로나 수단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합니다. 자식의 출세 문제, 사업 문제, 직장에서의 승진 문제, 가정의 평화 문제, 등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이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이 말씀을 대한다고 했을 때 과연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겠습니까? 출세, 사업, 승진, 아파트, 고급차, 이런 것들이 전혀 의미 없는 곳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말씀을 대했다고 생각해 본다면 결국 현재 우리의 기도라는 것이 우리가 처한 환경과 문명에 끌려가는 수준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환경을 초월하지 못하고 오히려 환경에 매이고 끌려가는 기도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크게 잘못된 생각은 기도를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 잘한다 못한다는 개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많이 기도하면 잘하는 것이고, 게을리 하거나 하나님이 주신다는 믿음이 없이 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로 우리를 가지로 비유하신 것은 열매는 나무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지 가지가 스스로 맺을 수 없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기도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발상 자체가 가지다운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부터 독립하여 살아가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다가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지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든 구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지에게 무엇이든 구하라고 말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5절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과실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과실은 우리 스스로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실은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있으면 저절로 맺어지는 것이 과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예수님 안에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자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행위적인 문제가 아니라 관계 문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는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행하신 그 행위를 믿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결국 믿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십자가의 은총으로 인해서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이 주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나를 살리셨음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만 하면 준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너희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가지의 자세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구하라고 말씀하기 전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안에 거하는 신자라면 과연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이러한 신자라면 무엇을 구해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구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 들으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까?’를 생각하기 보다는 먼저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구하면 다 이루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신자인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 소원을 두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총과 복을 누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