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10 사랑안에 거하라

9절에 보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나오고, 이어서 10절에서는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말씀을 연결해 보면 누구든 쉽게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뜻이구나’라고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생각처럼 간단치가 않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명을 지킨다는 문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뭔가 실천하고 행하는 문제를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십일조를 하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면 적어도 계명을 지키기 전까지는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함에 대한 대가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이며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 하나만이 근거가 되어서 우리를 사랑 안에 있게 하는 것이지 우리의 실천이 근거가 되어서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이해하신다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그 결과로 뭔가가 주어진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10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10절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하신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말씀에 대한 실천을 함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거하지 아니하시다가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 대가로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 역시 그런 의미에서의 지킴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계명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린 ‘계명’이라는 말씀을 대하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조목조목 실천하는 것으로 떠올립니다. 주일을 지키라든지 십일조를 하라든지 기도를 하라든지 봉사를 하라는 등등의 실천 항목을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계명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12절에 보면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계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말씀이 어떤 순서를 가지고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7절에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문제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으로 조금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10절에서는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함으로써 무엇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고, 12절에서 계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내 안에 거한다는 문제가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12절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구절을 봐도 예수님의 사랑은 이미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 하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하늘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 그것으로 너희가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이 확증 되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살게 되어지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무나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성품이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해봐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이성에 대한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성품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깨달음에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핍박하고 주님을 배척하는 자로 살아가는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사랑 안에서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과실이 무엇이겠습니까? 9절과 10절의 말씀을 비춰볼 때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맺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사랑을 우리가 맺어야 할 과실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사랑이라는 과실을 맺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지로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말라죽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과실은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갈 때 저절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마음 깊이 깨달으면서 그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로 살아갈 때 주님의 사랑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자로 살게 하실 것이고, 우리의 죄에 대해 항상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처럼 우리 역시 형제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리는 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음이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증거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즉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참으로 놀라운 사랑에 매인자로서 사랑에 요구하는 삶을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된 삶입니다. 신자로서의 감사와 기쁨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로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