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1-15 기쁨

11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인데, 이것을 예수님이 내가 기뻐하는 것을 주심으로써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해주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11절을 그러한 시각으로 이해함으로 인해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크게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바르게 이해하고 정립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쁨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대개 보이는 반응은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기뻐할 일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원하는 기뻐할 일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세상의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11절의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라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간과해 버리기 때문에 내가 기뻐하는 일을 이뤄주심으로서 나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 안에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뻐하신 그 기쁨으로 우리 마음이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뻐하는 것이 전혀 달라진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27절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11절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예수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줌으로서 평안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원하는 평안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렸던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안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근거가 되는 것으로 여기는 세상의 것이 주어질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과 환경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사람들은 평안과 안정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조그만 염려거리만 생겨도 금방 평안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평안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세상 것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듯 평안 역시 환경과 조건에서 오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가난한 분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제자들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엉뚱한 말만 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평안은커녕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사셨다고 해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평안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은 세상적인 물질, 조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것을 힘으로 삼는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이 힘이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며 평안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다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것을 과연 우리가 기쁘게 받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고자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세상 것을 기쁨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음을 뜻할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예수님의 것을 받아 누리고 예수님의 것으로 마음이 충족해지는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14절과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여기 보면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종이라고 일컫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서신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도 역시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정작 예수님은 너희를 종이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를 예수님의 종이라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종을 다른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수준의 종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사도가 자신을 종이라고 하는 것은 주인의 뜻에만 복종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가 말하는 종의 의미와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주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이렇게 하는지 그 마음을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면서 ‘주인이 말했으니까 실천하자’라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말씀한 종의 수준인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는 말씀하신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종의 수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그 마음을 헤아리는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종이 아닌 친구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제부터 나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만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여겨주시는 것이지 내쪽에서 예수님을 친구로 대하는 관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친구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친구라는 말은 종과 대비된 관계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종이 주인의 하는 것을 모른다면 친구란 주인의 하는 것을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로 살아가는 신자를 친구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는 자가 친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2,13절을 보면 예수님이 명하신 것은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는데, 이 큰 사랑을 보이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이처럼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형제에 대해 서로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구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자를 친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받는 관계로 불렀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받을 마음이 없다면 그는 예수님의 친구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는 예수님의 기쁨을 나누어 받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따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이 있는 신자이며 예수님이 친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기쁨을 달라’ ‘평안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달라고 하기 이전에 나는 과연 예수님과 친구된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기쁨은 버리고 예수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기를 원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받는 친구의 관계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나누어 받는 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 마음을 따라 살기를 기도하며 힘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