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강) 요한복음 15:16-20 신자와 세상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알게 된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이 있게 된 인간이 무엇이 부끄러운 것이고 무엇이 부끄럽지 않은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에서 인간이 판단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있는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할 때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해서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초라하고 작은 집, 그것도 셋집일 때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모습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세상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신자로 하여금 신앙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부끄러운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세상의 것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쓰는 삶이 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는 불의와도 타협을 해야 하고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18-20절을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 속한 자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대개 믿음에서 생각하는 것은 기쁨을 누리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평안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지 신자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세상 속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 정도로 생각할 뿐이지 본문의 말씀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때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고 반대를 받는 일이 있을 때 그것으로 당황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나는 정당한데 왜 이런 결과가 주어지느냐?’는 것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세상에서 정당하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거짓을 말씀한 것이 있습니까?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한 적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뿐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신자란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전혀 변하지 않는 세상에 의해서 예수님처럼 미움을 받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세상이 미워하는 것으로 인해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정당하게 행했으니까 세상이 나를 인정할 것이다’는 계산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겸손과 온유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님을 본받아 살 것을 말하면 ‘내가 그렇게 살면 나를 보고 변화된 사람이 있을까?’라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 앞에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면 남편이 감동을 받아서 변화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용서와 겸손과 온유를 행하려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신앙적으로 살아도 세상의 반응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럴 때 ‘내가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의심과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신자가 바르게 살면 세상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큰 착각은 없습니다. 신자가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세상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변할 것을 기대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바르게 살아서 세상이 변한다면 무엇 때문에 아들을 보내서 죽게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신자를 많이 만들어서 바르게 살게 하시는 것이 더 옳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신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바르게 살게 해서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세상을 다 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신자가 신앙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예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예수님께 속한 자는 예수님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신앙으로 살아갈 때 어떤 불이익이 있게 되고 손해가 있다고 해서 ‘신앙으로 사는 것은 손해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세상처럼 세상 것에 가치관을 두고 살아가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애당초 하늘에 모든 가치를 두고 산다면 세상 것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것을 손해라고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세상은 신자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바르게 살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가까이 함으로써 자신의 더러움과 악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7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고 뒤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것과 미움을 받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실 때는 우리에게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 속한 자에게는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의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도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는 자로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예수께 속한 자임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도 같습니다. 미움을 받음으로써 예수께 속한 자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고 미움을 받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미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예수께 속한 자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께 속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 속한 자로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상에 대한 기대도 버리고 손해라는 생각도 하지 말고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만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