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할 것이라는 내용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대 사회를 바라보며 그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한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처럼 현대 사회가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특별히 미움을 받는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현대인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인이라고 하면서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 사회에만 국한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러한 구절은 지금의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 그때의 상황만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어지는 것이라면 결국 문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존재하는 신자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증거했다면 그 현장에서는 반발과 미움이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다면 현 시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나 현 시대의 사람들이나 타고난 본성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미워한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그들의 죄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22절에 보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죄가 무엇인지를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심으로써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모두 죄였음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거들먹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악한 죄인이었음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평소 선한 일을 하고, 신앙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들을 보면 인간의 감추어진 악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살인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속에 감추어진 본성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악한 이상 인간의 모든 행위도 악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미움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속에 탐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속에 악한 것이 가득하면서도 평소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 행세를 했던 사람들이 결국 의인이 아니라 악한 자들이었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꼭 손을 씻고 먹는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악하다고 규정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인 바리새인들에게는 걸림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은 탐심을 가져도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과연 이 죄를 피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주로 말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버이날이 되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설교를 의례적으로 한번 하고 지나갈 뿐입니다.
십계명에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이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탐심을 죄라고 여기기 않습니다. 아예 자신의 탐심에 대해서는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탐심이 있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십일조 하지 않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가지고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회개하라고 할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탐심이 가득하면서도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신들의 행위를 내세워서 스스로 의인이라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실체가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죄가 지적될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칭찬듣기를 좋아하지 자신의 약점이나 잘못한 것에 대해 지적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가 드러날 때 과연 예수님을 환영하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인간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죄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의 말대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피흘리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는 우리의 머리로서 깨닫고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악하고 큰가를 발견했을 때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의 분량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드러나고 죄를 말하는 것을 거북스러워하고 기피하려고 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말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분명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속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의인이라, 착하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약 다른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아마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기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것이 편한 것은 상대방이 내 속을 보지 못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우리의 속을 보십니다. 다만 예수님을 그러한 분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주저함도 없이 예수님께 나온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23-24절을 보면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아무도 못한 일’이라는 것은 죄를 드러내신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아무도 인간의 죄를 드러내지 못했고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며, 우리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도우심으로써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인 됨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보혜사란 옆에서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심으로써 죄를 알게 되고 죄인 됨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자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됨을 알고 죄를 고백하게 되어진 것도 역시 은혜며 도우심이지 우리의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행위를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속을 보면서 모든 인간을 악하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는 의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행함만이 의가 되어서 나를 구원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돕기 위해 보혜사 성령이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