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0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본문>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욘 1:1-10)


 


 


<설교>


요나 이야기는 교회에서 아주 유명합니다.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치다가 풍랑을 만나 결국 바다에 던져지게 되고 물고기 뱃속에 삼키는 징계를 받은 후에 정신을 차려서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함으로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선교 명령을 거역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제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교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선교이야기도 아니고, 이방인의 구원이야기도 아니고, 회개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요나서의 중심을 보지 못하면 요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만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세워서 당시 이스라엘이 어떤 잘못된 사고방식에 빠져 있었는가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2절을 보면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한 내용은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면 니느웨의 악독을 책망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까? 니느웨의 악독, 즉 그들의 죄를 외치라고 하신 것은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의 심판을 경고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요나에게 이방 나라인 니느웨는 멸망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이유는 왕하 14장을 배경으로 하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하 14:25-27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선지자 요나가 등장합니다. 요나는 아모스 선지자와 함께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초대 왕인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던 때였습니다. 이처럼 죄에서 떠나지 않은 이스라엘에 요나를 보내서 심판을 선포하고 멸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것이라는 말씀을 외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죄가 가득하여 심판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에게 영토가 회복된다는 은총의 말씀을 외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는 형편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나가 외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영토가 회복되고 나라가 강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도울 자도 없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보신 자비와 긍휼에 의한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는 이스라엘이 죄에서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경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하시는 것도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서 회복하기 위함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멸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이방 나라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고 구원을 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자신이 니느웨로 감으로써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요나 자신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나만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사고방식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방인은 저주 아래 있는 자로 오직 멸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방인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복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긍휼과 자비 또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이방인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시스로 도망치는 요나는 요나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악이 가득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긍휼과 자비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악이 가득한 자에게는 심판과 저주가 어울릴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악이 가득한 자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요나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와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가기로 하고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탑니다. 3절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는 내용을 보면 당시 상황이 마치 하나님이 요나를 돕고 계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요나의 입장에서 일이 자기 생각대로 잘 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을 때 하나님은 풍랑으로 요나를 다스립니다. 즉 욥바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것이 요나 생각에는 일이 잘 풀리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바다로 나가게 하셔서 물고기 뱃속에 삼키게 하기 위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의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에 마음을 두기 보다는 하나님의 인도에 마음 두기를 힘써야 합니다.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고, 배가 파선을 위기에 처하자 사공들은 자기의 신을 부르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풍랑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자 이 모든 것이 신이 노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누가 신을 노엽게 한 자인가를 제비를 뽑아서 결정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요나가 제비에 뽑히게 되고 무리가 요나에게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8절)고 묻고,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9절)고 답합니다.



요나의 답은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도망을 치는 상황입니다. 그것 때문에 풍랑을 만난 것도 요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히브리 사람으로서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는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린 스스로를 신자로 말하면서 여호와를 섬기고 경외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요나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유익을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나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고 인정도 합니다. 그런데도 상한 심령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모든 것을 장난처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끊임없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생각이 수정되는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이 뜻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참되십니다.



선원들은 풍랑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신을 부르면서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풍랑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풍랑에는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삶은 인간의 뜻과 방법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 하나님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힘과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참으로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말씀으로부터 도망치는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풍랑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