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7  바다에 던져진 요나



<본문>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욘 1:11-17)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도망을 치는 요나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게 되고, 배에 함께 한 선원들로부터 자신이 풍랑의 원인자로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제 선원들은 풍랑을 해결하기 위해 요나에게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답합니다.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도망을 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여 풍랑이 있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자신이 죽으면 하나님의 진노도 자연히 해결되고 풍랑도 사라질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의 한계입니다.

 


세상은 전통적으로 이런 믿음으로 신을 섬깁니다. 죄로 인해 신이 진노하면 반드시 재앙이 오게 되고, 재앙은 신의 진노를 풀어주는 것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의 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신을 진노하게 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진 자신이 살아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은, 자신의 희생으로 선원들을 살리고자 하는 희생정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이방인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이 싫어서 말씀을 피해 도망을 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왜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을까요? 요나는 풍랑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안 이상, 자신이 죽지 않고는 풍랑이 해결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겠습니다’라고 마음을 바꿀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니느웨로 가겠다고 하면 풍랑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나에게서 끝까지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완고함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바다에 던져져 죽는다고 해도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내려지고 그들이 구원 받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생각하는 완고함이 요나에게서 나타난 것이고,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완고함이었습니다.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풍랑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잔잔해집니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게 됩니다.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을 믿을 자질이 있는 사람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구분되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택한 자만이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자질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에 대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전도를 하면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아무리 해도 믿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으로 구분하여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선입견으로 이방인을 평가하였습니다. 때문에 율법도 모르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은 전혀 알지 못한 그들은 오직 멸망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밖에서, 율법도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원들은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합니다. 이것은 선원들이 구원을 받았는가가 중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풍랑이 잔잔하게 된 것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런 기적적인 체험이 믿음의 힘이 된다면 그 누구도 이스라엘의 믿음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고,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에 있어야 마땅합니다.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풍랑이 잔잔하게 된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선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서원을 하게 되는 것이 풍랑이 잔잔하게 된 기적의 일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풍랑이 잔잔하게 된 일이 선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믿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외적 조건이나 체험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뜻하시고 하나님이 믿게 하고자 하신다면 누구라도 믿음에 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믿을 사람과 믿으면 안되는 사람을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이 판단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성경에 등장하는 옛날 얘기로 치부하면 안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물고기에게 삼켜져서 그 뱃속에 삼일 동안 있었다는 얘기를 마치 우화처럼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내용이고 오늘날 경험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기준을 가지고 이웃을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며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선교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과 상관없이 인간의 고집을 가지고 이웃을 비방하고 판단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긍휼을 짓밟은 자로 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요나서입니다.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다에 물고기를 준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자신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통해서 요나의 생각을 고쳐 가십니다. 그렇게 해서 기어코 니느웨로 가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 뜻을 포기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생각을 고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으로 크게 연연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일이 잘되면 기뻐하고 안되면 낙심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하나님은 신자를 그 마음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에 연연한 사람으로 살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을 증거할 증거자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선원들처럼 모든 노력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자로 만들어 가기도 하시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우리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자로 만들어 가기도 하십니다. 또한 항상 내 중심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각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요나는 자기 생각과 고집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완고함을 보여주는 좋은 모델입니다. 말씀보다 자기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짓밟아도 내 생각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됨을 보여줍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이 말씀을 짓밟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내 생각과 고집에 머물러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고집에 의한 평가와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믿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긍휼과 자비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것을 알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