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1  성내는 요나



<설교>


요나는 결국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만 그들의 구원을 염두에 둔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상과는 다르게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회개가 일어나게 되자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을 냅니다(1절). 여러분은 요나의 이같은 반응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라면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데 오히려 싫어하고 성을 내는 것은 예상할 수 없는 반응입니다.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요나에게나 이스라엘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습니까? 2절을 보면 요나는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내용의 기도입니다. 요나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니느웨에도 그같은 은혜와 자비로 대하실 것을 알았기에 다시스로 도망하였다는 것입니다.



니느웨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인한 그들의 회개를 요나가 어느 정도로 싫어하고 성을 냈는가는 3절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는 말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로 니느웨의 회개가 싫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요나의 이런 마음이 곧 이스라엘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베풀어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것도 오직 이스라엘을 대상으로만 하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로 재앙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이방인과 함께 공유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조상 대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제사 드리고 제물 바치면서 성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세상 이치로 생각하자면 요나의 성냄도 한편 이해할만 합니다.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은 이스라엘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의 몫으로만 주어져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니느웨가 구원을 받는다면, 이스라엘이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섬긴 것은 뭐가 됩니까? 그들은 한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요나의 잘못된 생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요나가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인간의 그 어떤 행함과 실천도 구원의 자격증이 되지 못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과 실천을 보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자를 사랑하시는 선택의 원리를 따라 일하심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앞에서 인간이 내려놓아야 할 것은 자신의 행함과 공로입니다. 자기 행함을 보게 되면 행함을 기준 하여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나누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한편 강도가 구원 받은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한편 강도가 구원 받은 것을 은혜라고 하면서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서의 상이 같다는 말에 대해서는 요나처럼 싫어하고 성을 내게 됩니다. 한 일이 다르고 수고한 것이 다르기에 그에 합당한 대우를 각기 다르게 받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리적인 계산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요나는 그냥 성 밖으로 나가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려고 그늘 아래 앉아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시고 마음을 돌이켜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까? 라는 기대를 가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그늘지게 하심으로 햇빛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요나는 그 그늘 하나로 크게 기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새벽에 벌레를 보내서 박넝쿨을 갉아먹게 함으로 시들게 합니다. 요나는 다시 햇빛의 괴로움으로 인해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불평을 합니다. 이처럼 박넝쿨 하나를 가지고도 성을 내는 것이 요나고,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나는 뭐든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 성을 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비로소 기뻐합니다. 왜 세상의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의 뜻대로 일하셔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니느웨가 구원 받는 것이 싫으면 하나님은 그대로 하셔야 하고, 자신이 햇빛에 노출되어 있으면 하나님은 그늘을 만들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것이 옳습니까?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라는 말로써 인간의 악함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인간의 악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일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되지 않는 것으로 분노하는 것이 인간의 악함입니다.



비가 와서 농사를 망치게 되면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농사를 망친 것으로 성을 내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해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10.11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요나는 자신을 시원하게 해준 박넝쿨은 아끼면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또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니느웨 백성을 하나님이 아끼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기에 하나님도 그를 마음에 들지 않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비록 내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그도 아끼시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재앙이 내려지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은 도외시하고 내 생각이 중심 되어 있는 죄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대한민국이 없고 은석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나라, 내 교회를 위한 하나님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중심으로 흐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