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신명기를 모두 마치고 오늘부터 여호수아서를 설교합니다. 신명기서와 여호수아서 사이에는 대전환점이 있는데 그것은 출애굽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해 오던 모세라는 인물이 죽고, 대신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등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니 이스라엘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모세 대신 여호수아를 내세우신 것을 '여호수아가 모세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잘못했기 때문에 모세를 죽이고 대신 비록 모세의 시종이지만 모세보다 더 나은 여호수아를 세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처사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했어야 할 남은 일을 대신 하기 위해서 세워진 자입니다. 모세에게 남은 일을 대신 하기 위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특별히 다른 사명이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를 모세와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일을 인간들의 힘을 빌어서 성취해 가신다면 분명 하나님은 좀더 능력 있고 믿음이 좋은 사람을 골라서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힘을 빌어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스스로 하십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담아서 세상에 부어 놓는 그릇의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릇이 능력이 있는 그릇, 능력이 없는 그릇으로 구분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릇은 단지 그릇일 뿐입니다. 뭔가를 담아서 부어 놓는 그 일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 그릇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전달하는 자이지 자신의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는 자가 아닙니다. 종과 주인의 차이점은 종에게는 자기 뜻이 없다는 것이고, 주인에게는 자신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은 철저히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종다운 종은 주인의 뜻과 의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보면 종의 역할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모세를 가리켜 말하기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 대신 세우는 여호수아를 가리켜 '모세의 시종'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힘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시종을 세웠습니다. 시종이란 늘 주인을 따라다니며 수종을 드는 종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종은 주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수아를 모세 대신에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갈 자로 세웁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일을 이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재능과 능력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으로서 여호와의 종이었던 모세 대신에 여호와의 종의 자리에 세움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모세를 다루시고 모세를 사용하셨던 것처럼 너를 다루고 사용하시겠다는 의도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것에 대해서. 성경을 밀쳐 버리고 자기 멋대로 꾸며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들은 곧 신약에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고, 구약과 신약 성경전체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들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신 방법들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다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표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도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신 방법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합니다. 마치 그것들은 오늘날 우리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진 모습들은 '너희들을 이렇게 다루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인도하셨습니다. 모세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셨던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모세 개인의 삶은 포기되어야 했고 희생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죽기까지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에게 함께 하셔서 그 평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종으로 세움 받은 모세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결국 모세의 인생이 이젠 너의 인생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모세를 다루었던 것처럼 너를 다루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제 여호수아에게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라는 개인이 존재하고 '나'를 위해서 살고 '나'의 목표를 위해서 일하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종으로서 '여호와'를 위해서 살고 힘쓰고 일할 뿐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으로 세움 받은 여호수아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주인의 사랑을 받고, 주인의 권세와 힘을 받아 누리는 것에만 있습니다. 마치 정승댁 종이 '우리 주인은 정승이다 아무나 정승댁 종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정승의 권세가 마치 자신에게 부여된 것처럼 위세를 떨치고 거들먹거리는 것만 즐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목사가 목사라는 위치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아무나 여호와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과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평신도와의 차별성을 두면서 특별한 권세와 힘을 누리고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정승 댁 종'과 같은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진짜 주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종이라면, 행여 자신의 행동이 주인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매사에 조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주인은 정승이다'라고 하면서 제멋대로 행동함으로서 주인된 정승에게 누가 된다면 그는 종의 자격이 없는 자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종이란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종이라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과 힘을 부여받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역시 특별한 권한과 힘과 축복을 부여받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모세가 해야 할 일을 계속 이어가는 자로 세움 받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은 많이 하면서 실제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뒤바꿔 버렸습니다. 즉 주인을 위한 종이 아니라 종을 위하는 주인이라는 거꾸로의 관계로 뒤바꿔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도 주인이신 하나님의 심기가 어떠한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고 관심조차 없고, 오로지 종의 입장만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은 내어붸김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신자에겐 '나'가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란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남겨진 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고 교회를 많이 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많이 세워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더욱 많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늘어날 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담아 세상에 그대로 붓기 위해서 남겨진 자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 '나'가 존재하면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 방해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개인의 사정과 입장을 고려하면서 수립되고 실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 속에서 얼마든지 신자된 우리들의 환경이 뒤바뀔 수 있고, 뜻하지 않았던 고통과 어려움에 빠져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속에 '나'가 존재하면 그럴 때마다 결국 나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순간 방해받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더러 자기를 써달라고 요청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써 달라고 요청하는 부분은 모두가 자신의 위대함과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일하게 해달라느니, 학교의 복음화를 이루게 해달라느니, 모두가 인간 편에서 볼 때 위대함을 드러낼 수 있는 일들만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사명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교회에서 성도들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에 힘을 쏟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모두가 다 작은 일과 큰일, 가치 있는 일과 가치 없는 일, 귀한 일과 천한 일 등으로 구분하면서 자신은 귀하고 가치 있고 큰 일을 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목사가 하는 것은 가치 있고 귀한 일이고, 가난하고 병든 약한 자가 신발장 정리하는 것은 가치 없고 작은 일로 여기는 시각이 곧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위해서 싸우겠습니까? 모두가 자신을 크게 하기 위해서 싸울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싸움에 열중할 것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가치를 하락시키거나 무시하는 자는 적으로 간주하고 용납하지 않는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이라고 할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교회를 크게 해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일에 매진하면서도 입으로는 여호와의 종이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단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종에게는 자기 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의 명령과 뜻을 전달받고 그것을 전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종입니다. 때문에 종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내 인생을 유지하기 위한 것보다는 주인 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쏟아 놓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증거물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이 드러난다는 것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해서 사람들로부터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달라'라는 칭찬을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좋은 일,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오신 분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의 흔적은 죄와 연관되어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시고자 했던 것도 인간의 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통해서 인간의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실패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서 실패의 결과는 죽음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실패를 극복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는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실패한 존재다. 약속의 땅을 차지할 자격이 없는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약속을 이루셨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만 순종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여호수아가 대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시종으로서 모세가 이해한 여호와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여호수아를 모세 대신에 세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에게는 자기 계획이란 것이 용납이 안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시고자 했던 남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남은 일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여호수아였습니다. 이것을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기 계획이란 것이 있고, 그것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적이고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그것과 싸우겠다는 것이고, 가나안 땅에서 그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천국을 얻은 자, 약속 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는 필연코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하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싸움을 통해서 십자가의 흔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은 이기기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승리한 자의 전쟁입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자이신 그리스도안에 머물러 사는가를 확인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을 확인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천국을 얻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을 얻은 자로 싸우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생명을 얻은 자로 싸우는 것입니다.
흔히 교인들이 신자의 신앙생활을 승리를 향해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신자는 승리를 향해서 올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승리한 자로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싸움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자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싸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린 이 말씀을 '이스라엘이 아무 땅이라도 밟기만 하면 다 주신다'는 약속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6절에서는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땅의 영역이 정해져 있습니다. 조상에게 약속한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발바닥으로 밟는 것을 다 주시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오직 약속의 땅만 사모하면서 그 땅만 밟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기 욕심껏 땅을 밟아서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마음대로 밟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 안에 사는 신자이며 이미 승리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다 주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주신다고 약속한 것만 주시는 분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지,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7-8절에 보면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율법대로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형통하게 하신다는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통이란 우리의 일이 형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신자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형통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형통을 자기 일의 형통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 형통해져야 하는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렸다가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고 다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서 전옥의 신임을 얻어서 옥의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된 것을 형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옥에서 잘되봐야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잘되려면 애굽에 팔렸다가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형통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요셉의 형통은 요셉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요셉은 애굽에 팔리고 옥에 갇히는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자의 형통이란 내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일을 생각해 버린다면, 결국 보여지는 것은 자기를 위한 싸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의 일보다는 내 일이 잘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것이 과연 종의 자세입니까?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은 감투도 아니고 권세를 받은 신분도 아닙니다. 단지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나타내 보일 존재라는 의미만 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종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방해하는 것을 적으로 삼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싸우며 살아갑니까? 세상의 것으로 내 육신을 채우기 위해서 싸우며 삽니까? 이것은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골 1:24절에 보면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며 살아갈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셔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습니다.
신자가 자기를 위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흔적이 방해를 받게 됩니다. 자기 손해와 희생을 싫어할 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우리 육체에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그 사랑만 앞세우며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시간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봅시다.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취소되지 않는 사랑과 자비에 눈을 돌리십시다. 그럴 때 그 사랑이 여러분을 여호와의 종으로 살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신을 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자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 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흔적을 담아내는 생애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