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7:1-5 실패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는 십자가만 고집하는 교회가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이 끊이지 않는 축제의 교회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좋은 교회란 예수님만 사랑하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생명으로 삼고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웃음과 즐거움과 정이 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절대 생명이 아닙니다. 교회 역시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셨다는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여서 친목단체 하나 만든 정도만 여겨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복음을 사수하기 위한 교회로 여기기보다는 친교와 여가활동을 위한 인간모임 정도로만 여겨버립니다.

이러한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성경을 볼 것이고,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기에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는 말씀에 대해서도 무시해 버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초대교회의 참된 성도들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서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빠진 것은 신앙이 아니요 교회도 아니며 단지 인간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빌 1:29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모든 것이 명백하게 증거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성경을 무시한 채 인간의 목소리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신비한 힘이 생기고, 불같은 열정이 생긴다는 식으로 강조해 버립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은혜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당연히 있어야 할 말이 사라지는 것은, 교회를 단지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여가활동 정도로 제공하기 위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에 심신이 피곤하고 여러 가지 고민과 염려거리를 안고서 오는 교인들에게 될수록 부담이 되는 말보다는 소망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는 말을 제공함으로서 교회가 편안한 안식처가 되게 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소위 부정적인 말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불문율처럼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결코 자신의 마음의 안식처를 얻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살후 1:4절에 보면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초대 교회가 인내했던 핍박과 환난이란 교회에 나올 수 없는 힘든 상황이나 형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교회란 무엇입니까? 단지 여가활동을 위한 장소입니까? 아니면 피곤한 심신을 달래주기 위한 곳으로 여깁니까? 그것도 아니면 인간끼리 모여서 서로 사귀고 정을 나누고 사랑을 받고 싶어서 나오는 곳입니까? 이것은 단지 교회를 친목단체로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절대'로 여기는 자들의 모임임을 다시 한번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직장과 가정을 자기 목숨처럼 '절대'로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만을 '절대'로 여기라는 것은 생존 문제를 뒤흔드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절대'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그리스도는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존이 '절대문제'로 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란 생존에 활력을 불어넣고 도움을 주는 곳 정도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교회는 인간 친목단체로 전락해 버린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성경도 관심이 없고, 하나님도 관심이 없으며, 재미가 없으면 쉬엄쉬엄 다니고 아예 다니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식이 되버립니다. 교회가 나에게 재미있으면 되지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결코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죽였는지 무엇에 의해서 죽으셨는지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남의 일로 여길 뿐입니다. 마치 TV에서 지나가던 행인이 강도를 만나서 살해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무덤덤하게 '뽸뽸'하는 정도입니다. '누가 죽였노?'하고 대신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남이기 때문입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모른 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 나는 무사하기 때문에 상관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죽은 자가 나의 아버지라면, 내 형제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죽인 자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분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교회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로, 나의 신랑으로, 나는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예수님이 죽으신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을 죽인 범인에 대해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죽였는지 알고 싶은 마음도 없고 마치 아버지가 죽은 후에 유산을 나눠 가지기 위해서 바쁜 모습만 보이고 있는 것이 현재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과연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인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기 유익을 위해서 교회를 찾는 자들에게 십자가니 고난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성경 또한 자신에게 유익이 될만한 것만 골라서 머리에 담아 두는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아간의 사건이나 이스라엘이 아이 성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당하는 얘기들은 전혀 흥밋거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만 들 것입니다. 아간이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몰래 빼돌린 사건이나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실패한 사건들이 내가 직장에서 승진하고 출세하고 돈버는 일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의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유익을 얻는 쪽으로 성경을 바라보면 모든 연결점이 단절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 개인의 입장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앞으로 어떻게 일하실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반발을 한다든지 복종하지 않았을 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이 말씀되어질 때는 절대로 인간 개인의 입장에서 말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빠진 채 인간들만 모여서 종교놀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나는 이 교회를 맡고 있는 목사다. 나는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고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교인들이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개인적인 욕망에 붙들린 채 본문을 본다면 아간의 사건을 통해서 무슨 말을 끄집어내겠습니까?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여리고성의 물건을 몰래 훔쳤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해서 큰 여리고 성을 이긴 이스라엘이 조그마한 아이성에서는 패배하는 벌을 받았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작은 일에도 실패하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또 개인의 입장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교인들은 자신에게 실패라고 하는 손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나에게는 아간과 같은 죄가 없는가? 혹시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못한 것은 없는가?'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별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나는 아간하고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구나. 아간처럼 망할 자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시되고 짓밟혀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는 이렇게 일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아간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의도가 완전히 묵살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와 같이 개인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인간에 의해서, 또 그런 인간이 모인 교회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은 철저하게 무시되어지고 왜곡되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아간의 죄와 이스라엘의 실패가 나옵니다. 여리고 성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 이후에 나오는 아간의 죄와 이스라엘의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즉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 대한 승리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기신 것이었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으로 여리고를 이긴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이 이기신 것을 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에서 하나님을 빼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는 것은 이스라엘이란 인간의 승리입니다. 인간의 힘이 남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종교적 자부심만 있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였으며 바로 오늘 우리들의 실패이기도 합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한 후에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수 6:18).

여리고 성의 정복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의 전리품은 당연히 승리자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자는 여호와입니다'라는 믿음으로 존재하는 증거는 모든 전리품을 말씀대로 여호와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승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전리품에 손댈 자격이 없다'는 것은 전리품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 바쳐진 것에 손을 댄다면 승리를 하나님의 승리로 여기지 않는 것이 됩니다. '나도 뭔가 한 것이 있으니까 나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에 손을 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18절에서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스라엘이 취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화를 당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합니다. 이것은 여리고의 승리를 하나님의 승리로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나도 한 것이 있다'는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한 결과가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간의 실패이자 이스라엘의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1절에서는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의 처사가 나옵니다. 분명히 물건을 취한 자는 아간입니다. 즉 아간 한 사람이 물건을 취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를 아간 한 사람의 죄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이해되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계산법으로는 도저히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간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를 모든 인류의 죄로 보셨습니다. 당시 생존했던 인간만이 아니라 아담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아담의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 본성이 인간에게 있다면 그것은 아담의 죄와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간의 죄는 아간 한사람에게만 있는 죄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있는 죄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몰래 취하게 한 그 본성은 아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있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행위를 가지고 죄의 여부를 판별한다면 분명히 아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이스라엘 자손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간의 죄를 이유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진노하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간의 모습이 곧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이기 때문에 아간의 죄는 이스라엘의 죄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에게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아간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 미심쩍어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잘한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지 않느냐 내가 잘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잘못해 버리면 그 죄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아간의 죄와 같은 것입니다.

즉 '왜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나도 잘못한 것으로 취급받아야 하느냐? 그렇다면 내가 잘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이 생각은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는 것을 무시하고 '내가 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서 잘한 모습이 보여지는 것은 실패한 나를 하나님이 이기시고 극복하신 결과이지 내 힘이 아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내가 바로 아간이다'는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나는 잘했다 너는 못했다'는 구분 자체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과연 '나도 아간이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겠습니까?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잘한 행위 못한 행위를 따지면서 믿음의 여부를 측정하는 교회가 다른 사람의 죄를 나의 죄로 인정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의 죄를 나의 죄로 인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는 너의 죄로 지옥 가고 나는 나의 믿음으로 천국 간다'는 것이 현대 교회의 사고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피로 세우신 교회의 관계가 완전히 박살나 버린 인간 종교단체의 모습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하나된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를 필요로 하는 자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는 자입니다. 예수 앞에서는 죄에 등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작은 죄가 있고 큰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는 오직 멸망입니다. 멸망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나의 죄는 작고 너의 죄는 크다'는 시각으로 옆사람을 바라본다면 과연 그것이 동일한 그리스도의 피 아래 모인 교회이겠습니까?

그런데 오직 개인의 유익을 생각하며 모여든 교회에서는 죄에 차별이 있고 상에 차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의 피가 한방울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바가지가 필요한 웃지 못할 현상이 마치 진리처럼 여겨지면서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아니며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지 못할 모습이라는 것을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간의 죄와 이스라엘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2절부터 나오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 역시 그들도 아간과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리고를 함락한 이스라엘이 이제는 아이 성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아이로 보내서 그 땅을 정탐하라고 합니다. 아이를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은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7:3)라고 말합니다. 정탐꾼의 말대로 이스라엘은 백성 중에서 삼천 명을 보내서 아이를 치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여리고라는 큰 성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여리고에 비해서 작은 아이 쯤이야 삼천 명만 가도 능히 이긴다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사람에 의해서 36명이 죽고 쫓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이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린 그 원인을 단순히 아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에의 실패의 원인이 단지 아간의 죄로 국한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여리고에서의 승리를 자기들의 힘으로 여긴 결과였습니다. 여리고는 강한 나라입니다. 강한 나라를 쳐서 이겼다는 것은 우리가 더 강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리고를 이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결국 강하신 분은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리가 여리고를 이겼으니까 우린 강하다'고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여리고와 비교해 볼 때 3천명만 가도 이긴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를 치신 것은 약속의 땅에 비언약 백성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땅에 더러운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여리고의 승리를 자기들의 힘으로 여겨버린 이스라엘은 바로 아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간이 '나도 여리고의 전리품을 가질 수 있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바친 물건에 손을 대서 하나님께만 가야 할 영광을 자기에게 돌려버린 것이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승리를 자기들의 힘으로 여겨서 그 힘을 과시하려고 한 것이나 같은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된 행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세상은 강자와 약자라는 구조 속에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누르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자와 약자의 기준은 힘입니다. 돈, 권력, 명예, 남보다 뛰어난 모든 것은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강자와 약자의 기준은 거룩함과 더러움입니다. 거룩한 존재가 강자이며 더러운 존재는 약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러운 존재는 진노의 대상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자는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의 전투를 거룩하신 분, 강하신 하나님이 더러운 존재를 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상 힘의 구조에 의해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누르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리고를 이긴 우리가 더 강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세상의 더러움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에서 실패하게 하심으로써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교회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과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만들어낸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교회는 무너져야 할 여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수고와 노력을 동원해서 만들어낸 교회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가 교회를 이만큼 만들었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능력을 대견해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단지 말뿐이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로 돌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간이며 자기 힘으로 아이를 친 이스라엘입니다. 결국 그들이나 우리나 같은 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교회를 원하시지 큰 교회를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은석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냐는 것이지 은석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간은 이스라엘 안에 숨겨진 죄입니다. 마치 우리들 속에 숨겨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속에 있는 죄를 모르고 '하면 된다'고 설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죄를 모르고 스스로 강한 자로 여기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자기도 바친 것이 되었다는 말은 이스라엘도 하나님 앞에 바쳐진 여리고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도 더러운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마치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한 것처럼 여긴 것이 바로 더러운 존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으면 되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어도 힘이 없어도 괜찮은 존재가 바로 약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입니다.

교회란 힘없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힘을 자랑한다면, 세상 힘을 기준으로 '나는 강자 너는 약자'라고 구분한다면 그가 바로 망해야 할 여리고입니다. 이것을 아는 교회가, 부흥을 외치고 '하면 된다'는 말로서 교인들을 진노의 길로 밀어붙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약자,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를 소원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떠나십시오. 그렇게 해서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이 오히려 교회로 남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간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아간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을 살리시는 분은 오직 의로 오신 그분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