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7:16-26 존재 이유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세상에 오신 메시야는 이미 그 이름이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진 채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마 1:21절의 말씀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 안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확정되어져 있는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 나와서 인간의 소망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독자적인 자기 계획과 목적을 세우시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신 분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신자가 예수님을 찾는 목적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뜻에 맞는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고 성취해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소원과 내 뜻을 들고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예수를 찾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단지 메시야에 대한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모든 일이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믿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행 2: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마 7:21절에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부른다'는 것에 대해서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예수님을 부르고 있느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을 세상의 악한 죄에서 나를 빼내 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세상 죄가 아니라 저희 죄라고 말씀합니다. 즉 내 죄입니다. 나의 죄에서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의 말씀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예수를 부른다고 해도 그 예수는 다른 예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와 분리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흔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죄와 분리된 삶을 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그러한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포장을 해서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죄와 멀어져 있고, 죄와 상관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죄와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죄와 분리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은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인간은 죄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죄와 인간이라는 분리된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즉 인간 속에 죄라는 세력이 따로 존재하는 구조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죄와 인간은 하나입니다. 인간이 곧 죄인이고 죄인이 곧 인간인 셈입니다. 때문에 죄라는 것은 내 속에서 몰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을 신자 안에 있는 죄를 예수님의 힘으로 몰아내 준다거나 몰아낼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만약 죄가 인간의 힘으로 몰아낼 수 있는 것이고, 또 죄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점차 자기에게서 죄가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이기고 있다거나, 죄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착각을 가질 때가 많은데 이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를 행위로만 보기 때문에 죄라고 생각되는 행위가 자기 의지에 의해서 억눌릴 때 그것을 죄를 이기는 것으로 여기고 행위의 빈도가 줄어듦으로서 죄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분명히 한다는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의 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지 죄를 이기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그리고 예수님의 삶 모두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의 실체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실체를 앎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죄에 대해서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분명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에게 바친 물건을 몰래 훔쳤습니다. 그에 대한 진노로 아이 성을 공격한 이스라엘은 실패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스라엘은 죄가 없었는데 아간의 죄 때문에 애매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고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기 되면 모든 원인은 아간 한 사람에게만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성을 칠 때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보다 작은 아이 성을 무시하는 정탐꾼의 말대로 삼천 명만 보내서 아이 성을 공격하게 합니다. 이것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을 하나님의 힘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으로 보는 결과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아간이나 이스라엘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것은 하나님의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즉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기 보다는 나에게도 뭔가 남겨 두고 싶은 탐욕입니다. 이 탐욕이 결국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정해야 할 것을 자기들의 힘의 결과로 끌어당깁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곧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아간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바친 것을 훔친 아간이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실패의 원인을 알아야 했습니다. 즉 실패하게 하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성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재주와 힘을 의지하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16-18절을 보면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을 제하기 전에는 대적을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몰래 가진 자를 뽑아내기 위해서 먼저 지파를 뽑고 다음에 족속을 뽑고 다음에 가족을 뽑고 다음에 바친 물건을 가진 자를 뽑아 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지파대로 나오게 하였더니 유다가 뽑힙니다. 이 유다 족속을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족속 중에서 세라 족속이 뽑힙니다. 세라 족속의 남자를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 가족이 뽑힙니다. 이 삽디 가족의 남자를 나오게 하였더니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 유다 지파를 뽑고 유다 지파 안에서 세라 족속을 뽑고 세라 족속 안에서 삽디 가족을 뽑고 삽디 가족 중에서 아간을 뽑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 뽑아 내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속에서 아간을 바로 뽑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지파에서부터 족속과 가족으로 그리고 한 개인으로 점차 점차 내려갔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중에서 아간을 바로 뽑아서 징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 지파부터 시작해서 점차 개인으로 내려가는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아간을 뽑아서 아간 한 사람을 징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간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지파의 죄를 보시는 것도 아니고 한 가문의 죄를 보시는 것도 아니고 가족의 죄를 보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개인의 죄를 보실 뿐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말할 때 사회의 죄를 말하기도 하고 가문의 죄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회의 죄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회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문이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죄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라는 것은 인간이 모인 단체를 이름하는 것입니다. 그 국가 안에 가문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인간이 모인 구성 단위일 뿐이지 인격체는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모인 구성 단위가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사회가 어둡다든지 나쁘다든지 타락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회가 어둡고 타락하고 나쁜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어둠이고 악한 자고 타락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흔히 교인들이 많이 하는 말 가운데 '우리 교회가 사랑이 없다'는 말도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란 신자의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사랑이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린 보통 죄를 생각할 때 자신은 죄에서 멀어져 있는 자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회가 어둡다고 할 때 내가 바로 어둠의 존재인 것은 망각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로 인해서 사회가 어두워진 것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란 사회의 문제도 아니고 가족의 문제도 아니며 오직 나 개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의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죄를 묻습니다. 때문에 신자에게는 '너 때문에'라는 말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고 나 때문에 발생된 문제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죄는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죄가 저 사람에게는 없고 저 사람에게 있는 죄가 나에게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누군가가 도둑질을 했다고 할 때, 저 사람은 도둑질을 한 죄가 있지만 나는 도둑질을 안했으니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 상식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도 죄를 이런 식으로 보신다면 분명 죄의 경중이 발생할 것이고,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만 조심하면 얼마든지 죄없는 자, 또는 죄가 극히 가벼운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마음을 보신다는 것은 죄는 그 마음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탐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는 탐욕이 없습니까? 모든 인간은 탐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도둑질을 안했으니까 죄가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가 바로 이것을 말해줍니다. 아간이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훔쳤으면 그것은 아간 한 사람에게서만 보여지는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 그리고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간은 하나님께만 바쳐져야 할 물건 중에서 좋은 것을 자기 것으로 챙겼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항상 좋은 것은 자기 소유로 하고 싶은 탐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승리를 자기들이 승리한 것으로 여김으로서 자기 힘을 의지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죄가 어떤 것인가는 아간 한 사람을 통해서 확실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간의 죽음은 이스라엘이 왜 아이 성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인 것입니다. 인간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느냐가 아간에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실패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패를 알아야 인간에게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고 살기 때문에 자신이 성공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성공하고 싶어하고, 자신이 세상에서 성공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한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승리자가 되고 내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오면 자신을 성공자로 만들어 달라고 애원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자기 실패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 실패를 아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것은, 내가 곧 실패자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성공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아간 한 사람을 찾아내서 죽이심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간을 즉시로 나오게 하지 않고 유다지파로부터 차근차근 밑으로 내려가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보고 지파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지파를 보고 가문을 평가하지 않고, 가문을 보고 개인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선택받았다고 해서 그 속에 속한 지파가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개인을 보고 평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교단이라는 단체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단을 보시고 교회를 평가하시고, 교회를 보시고 교인을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교단이 아니고 교회가 아니라 한 개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개인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존재하게 하시는 목적에 맞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잘라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참된 이스라엘만 남기기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인간은 잘라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세상에 구원을 보여줄 수 있는 일에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구원의 내용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이스라엘이 담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이스라엘 되는 것이고 존재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내용물이 뭐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살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담고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산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보기에 좋은 것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21절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아간은 보기에 좋은 옷과 금덩이에 마음을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훔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에 전혀 반대된 모습입니다.

아간은 '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관심은 여리고의 좋은 물건들을 보면서 '저것만 내가 가지면 행복하겠는데'. 온통 여리고의 좋은 것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자기 존재 이유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간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전체가 보면서 자기 존재 이유를 알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이스라엘 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그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라는 것을 아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잊어버린 것에 있습니다. 왜 내가 이스라엘 되었는지, 왜 살게 하시는지 그 이유에는 관심이 없고 보기에 좋은 것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러한 아간의 죄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왜 세상에 왔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교회로 부르신 이유는 세상에 구원을 보이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존재 이유만큼은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구원의 내용물을 담고서 살아가는 신자가 주님의 몸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그분 앞으로 이끌어 내셨습니까? 단지 여러분을 천국 보내주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 내신 것은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실패를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졌기 때문에 천국 가는 자가 되었음을 보여주라고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이유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이 구원의 내용물로 가득한 삶인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내용물이 여러분에게 차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아간의 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구원자이시고 참된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차있기를 바랍니다. 실패자인 내가 다시 산자가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는 감사와 감격이 여러분의 마음에 생명 되어서 여러분을 통해서 증거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세상에 구원을 보여주는 도구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