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8:1-9 교만

성도란 그리스도안에서만 규정되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신자를 난감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세계를 의미합니다. 흔히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말을 그리스도로부터 세상적인 도움을 받는다는 의미로 인식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살아가는 세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세계는 신자에게 연약한 존재되기를 요구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안'이란 신자를 난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선은 강한 자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그리스도안이라는 세계에 대해서 전혀 난감해 하지 않습니다. 주저함이 없이 그리스도안에서 살겠다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리스도 안이 어떤 세계인지도 모르고, 그리스도안이란 세계가 신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안에 살면 그리스도 덕분에 자신이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축복을 받아서 잘살아가게 될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려볼 수 있는 복의 공간으로 인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세계를 자기와 함께 쓴잔을 마셔야 하는 세계로 말씀을 합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에게 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우리들을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관심을 그리스도세계에서 주님의 좌 우편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힘있는 위치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남들보다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는 것이 관심거리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막 10:38,3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세계에서 나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시는 자들이 얻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란 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마신 쓴잔을 함께 마셔야 하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을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는 울타리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나머지 단추는 자연히 잘못 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힘'을 포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에 접근하는 것이 이미 첫단추를 잘못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힘과는 상관이 없는 분임을 현대교회가 전혀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힘되고 도움이 되는 예수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교회에 약한 자로 오시고 세상이 볼 때 별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쓸모 없는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과연 환영을 받겠습니까? 설령 과거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만큼은 세상에서 힘있는 자가 되도록 도우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이셨던 자신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신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이란 기적을 일으키고 병을 고치셨던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분배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끌어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셨던 잔을 함께 마시도록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일에 대해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고 성취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그 능력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붙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있으니 그 능력을 믿을 뿐이지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우리 힘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는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죽음 안에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세계란 그리스도의 힘 안에서 살아가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힘없어도 괜찮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세계란 어떤 세계를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세계라는 것을 이스라엘이 아이 성을 치는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아간을 찾아내서 죽이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간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이 세상에 구원을 보이라고 세워놓으신 구원자의 위치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원자로서의 모습을 상실해 버린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힘을 믿고 아이 성을 스스로 공격하고자 했던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하시고,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아간을 찾아내서 죽이심으로서 이스라엘이 왜 실패했는가를 보이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스스로 자립하고자 했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한 것입니다. 즉 천국에 대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는 스스로 자립하여 살고자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자립심이란 그리스도의 세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립심은 선입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경받고 박수를 받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남의 도움을 구하고 남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악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강한가를 봄으로서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미리 판단하기도 합니다.

학교 교육이라는 것도 결국 모든 목표를 여기에 두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되게 하는 것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이 목표인 것입니다. 남의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야말로 힘을 기르고 자립심을 기르는 것이 최상의 교육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남의 도움을 구한다는 것이 못난 자로 낙인찍히는 길이고 쓸모 없는 자로 보여져서 결국 도태 대상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 곳이기에 힘이 곧 선이며 힘있는 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있고 힘없는 자는 뒷전으로 밀쳐지게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누구라도 힘을 축척하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사는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힘으로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 앞에서 과연 난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갈등이 없을 수 있습니까? 갈등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곧 아간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소유하고 싶다는 것은 그것이 곧 나에게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간이 훔쳤던 아름다운 옷, 그리고 금덩이들, 이 모두가 소유함으로서 자동적으로 힘이 실어지는 물품들이 아니었습니까? 부자들이 왜 몇 백만원씩하는 옷을 사서 몸에 걸치려고 안달입니까? 왜 비싼 외제차를 사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차별성입니다. 승리욕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과시함으로서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을 광고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에게 지기 싫어서 남이 하면 나도 해야 되고, 남이 사면 나도 사야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세상에서 힘없는 자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난이며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세계를 살아가는 천국 백성의 모습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전혀 부담이 안되고 갈등도 없이 들려진다면 아마도 그분은 천사이거나 아니면 세상을 완전히 초월을 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것을 훔친 아간을 죽인 후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다시 아이 성을 공격하라는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을 공격하라고 하시면서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기 전에 당부하셨던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 이이 성을 공격할 때 실패한 경험에 의해서 두려움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승리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자기들의 힘으로 아이 성을 공격했을 때의 실패를 생각한다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했는데 다시 공격한다고 해서 승리할 수 있는가라는 염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아이 성의 공격은 오직 자기들의 힘으로 승리해 보려는 전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실패하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 보려고 하는 자립심에는 승리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승리하고자 할 때 승리한 자는 교만해질 것이고 실패한 자는 두려움과 낙심에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여리고의 전투, 그리고 이스라엘과 아이의 전투, 그리고 두 번째 이스라엘과 아이의 전투에서 승리자의 교만과 실패자의 낙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맨 처음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공격할 때는 여리고가 약한 자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5:1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소문을 들은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6:1절에서 여리고가 성문을 굳게 닫고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을 봐도 여리고는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두려움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는 싸움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단지 문을 굳게 잠그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시 전혀 전투를 하지 않고 다만 성 주위를 도는 것으로서 여리고가 무너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승리에는 인간의 힘이나 수단이나 방법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직 하나님의 승리이지 인간과 하나님이 연합한 승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리고는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자신들의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즉 이스라엘을 이길 힘이 자신들에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려움도 자신의 힘을 기준으로 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만이 있습니다. 승리를 하나님의 승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승리로 받아들였을 때, 약자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없는 자는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교만은 승리자인 이스라엘이 여리고보다 작은 아이 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가지고 아이 성을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자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라고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을 알아야 인간이 자기 것을 주장하고 세상에서 주어진 것을 자신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곧 교만이며 하나님께 적이 되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은, 싸움은 너희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시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아이 성에서의 실패를 생각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2절에 보면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이 성을 정복했을 때 여리고와 마찬가지로 모두를 멸하되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여리고의 경우와 다른 점입니다. 여리고에서는 여리고의 물건과 가축은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여리고의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 성에서는 탈취한 물건과 가축을 스스로 취할 수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분명 아이 성의 것을 이스라엘에게 허락을 하신 것이지만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것을 주십니다. 아이 성의 것을 이스라엘이 스스로 취할 수 있도록 하신 것과 같이 세상의 것을 스스로 취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취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리고 성의 것을 다 멸해야 했던 것은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여리고의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자가 이스라엘이니까 여리고의 것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 성의 물건을 취하라고 하신 그 배경에는 여리고의 것을 취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 성의 것을 취한다고 해도 너희는 아이 성의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 것을 허락하시지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자는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모두 멸해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의 것을 얼마든지 스스로 취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돈을 버십시오. 여러분이 수고한 만큼 땀 흘린 만큼 얼마든지 돈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돈을 적게 번다는 것이 잘한 것도 아닙니다. 돈을 얼마를 벌었든 중요한 것은 돈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여리고의 모든 것이 멸망을 당한 것처럼 돈도 역시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신만 여러분 속에 살아있으면 됩니다. 돈을 힘으로 삼지 않고, 돈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살고 그리스도와 즐거워 하고자 한다면 그는 아무리 돈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신자입니다. 이것을 아이 성의 것을 스스로 취하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돈이 많아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돈이 많아서 교만해진다면 돈이 적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겸손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나 돈이 적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힘에 굴복 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힘에 굴복한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힘으로 사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서 굴복하는 자의 마음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면서 '나도 돈을 벌어야지. 돈을 벌어서 언젠가는 너를 이겨야지'라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역시 자신보다 약한 자는 자기 앞에 굴복시키고 무시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돈을 힘으로 삼는 것이며 교만입니다.

아이 성 역시 이러한 교만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아이 성을 공격했을 때 아이 성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은 아이 편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 편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이를 좋게 보셨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힘으로만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아이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아이 성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 성은 이러한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자기들 편에 하나님이 있어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상상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으로 여깁니다. 여리고라는 큰 성을 함락시킨 이스라엘을 자신들이 물리쳤으니 얼마나 기고만장하겠습니까? 그래서 두 번째 아이 성의 전투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에 서심으로서 하나님의 적은 교만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교만했을 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침으로서 교만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반대로 두 번째 전투에서는 아간을 죽임으로서 자신들의 실패 이유를 알게 된 이스라엘 편에 서서 아이 성을 멸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적은 교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치는 것이 아니고 아이 성이라는 국가를 치는 것이 아니라 교만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은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교만입니다.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내가 잘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이 교만을 적으로 보시는 것은, 교만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를 많이 하고, 십일조를 잘하고, 주일을 잘지키고, 구제도 많이 해서 이만한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인간을 죽어야 할 죄인으로 규정하고 의가 없는 자로 판단해 버리고 모든 행위까지 쓰레기 취급을 해버리는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승리를 하나님의 승리로 받아들이는 자는 절대로 자신이 잘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두 번째 아이 성을 공격하는 방법은 여리고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리고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은 단지 여리고를 돌았을 뿐입니다. 전투를 위해서 작전을 짜거나 직접 여리고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을 두 번째 공격할 때는 작전을 짜게 됩니다. 용사 삼만 명을 뽑아서 성 뒤로 가서 매복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나머지 사람들은 아이 성으로 갑니다. 처음 전투에서 승리한 아이 성은 분명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마음놓고 공격을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호수아와 나머지 백성들은 도망하는 척하고, 그 뒤를 쫓아오는 아이 군사를 매복해 있던 삼만 명의 용사가 전멸시킨다는 작전입니다. 그리고 그 작전대로 이스라엘은 승리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일에는 인간의 작전도 필요하다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흔히 선교단체에서 선교를 할 때 '전략'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어떤 전략을 써야 효과가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략을 잘 세워야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머리와 방법으로 이긴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에서는 손 한번 쓰지 않고 작전도 세우지 않고 승리한 것을 통해서 승리는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만 분명히 한다면 아이 성에서 인간들이 작전을 세웠다고 해도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시니까 아무런 방법도 쓰지 말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어떤 방법을 다 동원해도 결국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을 마음대로 벌되 돈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 아이 성의 전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적은 교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교만이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자기 힘으로 스스로 이루려고 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기도를 많이 해서 그 힘으로 자기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나, 성경을 많이 보고 십일조를 잘해서 그 공로로 하나님의 덕을 보려고 하는 이 모든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자는 절대로 자신의 방법이나 행위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힘과 공로만 의지할 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주님만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갈 힘이 나에게 전혀 없기 때문에 주님의 피의 은혜에만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이 있는 자의 편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고 여러분이 힘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오직 주님의 공로만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