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8:30-35 축복과 저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의 순서를 보면 맨 마지막에 사람이 지음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우월성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이 맨 마지막에 지음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못마땅함도 '하나님이 인간을 맨 마지막에 지으신 것은 인간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는 말로서 메워 보려고 하기도 합니다. 마치 무슨 행사를 할 때 주인공은 항상 나중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맨 처음 만들었다면 또 뭐라고 말을 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역시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맨 처음 지으셨다'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해석'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자기 멋대로 난도질해서 자기 편한 대로 갖다 붙여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인간편이다'는 것을 아예 전제로 해놓고 모든 성경을 인간 쪽으로 끌어와서 인간을 높이고 가치 있는 존재로 격상시키는 도구로 이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모임으로 전락해 버린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절대로 인간을 귀한 존재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인간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것 같은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십시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답고 깨끗하고 하나님에게 안식이 되었던 에덴을 더럽히고 망쳐버린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을 망쳐버린 인간을 원수로 보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결은 고사하고 아예 처음부터 에덴에서의 인간은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무조건 하나님은 인간을 도우신다거나 인간을 위해서 일하신다고 해버리면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정성을 다해서 아름답게 만들어 놓은 정원에 강아지가 뛰어 들어와서 여기저기 뛰어 다니면서 꽃을 뭉개 버리고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할 때 여러분은 그 개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겠습니까? 여전히 귀엽고 예쁜 강아지로 바라보겠습니까 아니면 붙잡아서 매를 때리고 혼을 내줄 대상으로 바라보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짓이 주인의 마음을 분노하게 했다는 것도 모르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서 재롱을 떨고 주인에게 달려온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같잖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인간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보면 마치 주인의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주인을 분노하게 했으면서도 주인에게 재롱을 떨며 달려드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개인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 개인을 위해서 존재하시고 나 개인을 위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이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게 된 모든 이유가 하나님을 나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의 개인적인 사정을 외면하지 않는 분이시고 내 개인적인 문제와 어려움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도우시고 해결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와서 요청을 할 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공통적인 생각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주인이 아끼는 정원을 망가뜨린 강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두고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재롱을 떨면서 '나를 사랑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면서 꼬리를 내리고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이 아끼시는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가 안되시는 분을 위해서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시고 인간을 맨 나중에 지으신 것은 '만물 중에서 누가 더 귀하고 우월한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인간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담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맨 나중에 지음 받았고, 하나님이 그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즉 인간은 천지창조에 개입한 적도 없고, 또 인간의 의도와 인간이 바라는 대로 창조되어진 세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주어진 것을 다스릴 뿐입니다. 결국 받는 존재이고 받은 것을 누리는 것이 인간의 원래 모습이며, 또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계속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유지되는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받고 받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상태의 인간을 가리켜서 '본래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받은 것을 누리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존재로 되버립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타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리고 본래의 인간 상태를 잃어버린 '비본래적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만드신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원에 세워진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상태로 존재함으로서 정원의 아름다움이 유지되는 것이었는데 사탄의 유혹에 빠진 인간이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옴으로 해서 정원의 아름다움이 뭉개지고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의 인간 역시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비본래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란 하나님의 것을 더럽히는 존재이지 결코 하나님을 도운다거나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저주는 하나님이 그냥 한번 해본 소리가 아닙니다. 그 순간 화가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의 저주는 세상 마지막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저주입니다. 그 저주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들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자세히 밝혀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몇천년전의 일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으로 대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복을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는 것을 묻고 싶어서입니다.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들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까?

현대 교회에서는 교회생활, 즉 종교생활에 착실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착한 행실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에서 내어쫓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교회 생활을 안했기 때문입니까? 기도를 안했기 때문입니까? 착한 일을 안해서 하나님이 마음에 안들었던 것입니까? 그 어느 것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쫓겨난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받은 대로 누리고 감사하고 살아가면 될 인간이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게 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서 쫓겨나야 할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분노하신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고 성경보고 착한 일하고 교회 생활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인간된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로부터 쫓겨나야 할 이유였다면, 오늘날 수많은 교회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은 결국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죄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기도가 인간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거리로 등장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의 인간은 받은 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면서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려고 합니다.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수정하겠다는 의지가 바로 기도와 종교생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인간을 거부하십니다. 받은 대로 살아가는 인간을 기뻐하시는데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이미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된 우리가 '자기 요청'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자기 요청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순간순간 자기 요청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 틈에서 누군가를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택한 인간을 이용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일에 쓰여지기 위해서 불러냄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용해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나를 불러냈으니까 나는 천국가겠지라든가, 나를 복주시겠지라는 등의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불러냄을 받은 성도가 어떤 일에 쓰여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을 말씀드리기 앞서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만이 본문에 깊숙이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아이 성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에발산에서 단을 쌓는 내용입니다. 아이 성의 전투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적은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자를 치십니다. 교만은 배후에 하나님이 일하심을 생각지 않고 자기 힘으로 스스로 자립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립심이 있습니다. 자립심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받은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요청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의 전투의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 결과 아이 성은 자기들의 힘으로 정복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자립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립심은 이스라엘에게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아간을 죽이고 난 뒤에 다시 아이 성을 공격합니다. 그때는 아이 성이 자기들의 힘을 믿고 이스라엘을 무시합니다. 즉 이스라엘을 패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배후에 계셨던 것을 모른 것입니다. 이처럼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산다는 것은 신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성의 전투에서 승리 한 뒤 에발산에서 단을 쌓습니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에발 산은 저주를 선포하는 저주산입니다. 그리고 그리심 산은 축복을 선포하는 축복 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을 쌓는 장소가 에발 산 즉 저주 산이라는 점입니다. 단을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단을 쌓는다면 당연히 축복 산에서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에발 산에서 단을 쌓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됨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원을 망가뜨린 인간의 죄를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축복 산과 저주 산을 두시고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주 산에서 단을 쌓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시고 과연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셔야 할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앞에는 축복 산과 저주 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절반은 그리심 산에 서서 절반은 에발 산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34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의 말과 저주의 말을 낭독을 합니다. 신명기 27장과 28장을 보면 축복과 저주의 율법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 법을 말씀하시는 의도는 법을 잘 지켜서 저주를 받지 말고 복을 받아라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인간은 없다는 것에 대한 선포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절반은 그리심 산에 절반을 에발 산에 서게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역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야?'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도로 접근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통해서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역시 복과는 상관이 없고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저주를 받아야 하고 멸망을 당해야 할 악한 자임을 율법을 통해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낭독되어질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희들이 바로 저주받아야 할 악한 자입니다. 우리 역시 멸망당한 여리고나 아이와 다를 바가 없는 더러운 인간입니다.'라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저주 산에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 바로 율법 앞에서의 이스라엘 모습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무엇 때문에 에발 산에서 단을 쌓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단을 쌓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에발 산에서 단을 쌓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단을 쌓는다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즉 죄에 대한 용서는 희생의 제물이 흘린 피를 통해서 오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제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단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죄를 아는 자이고, 죄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저주받아야 할 인간임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자를 그리심 산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에발 산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당연히 에발 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심 산에서는 죄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심 산에 선 사람들은 모두가 '나는 복을 받아 마땅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정성과 노력으로 복을 받겠다고 하면서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스스로 어디에 세우시겠습니까? 그리심 산입니까 에발 산입니까? 말로만 '나는 저주받아야 할 자입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인들은 종교 행위 안에 죄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리심 산에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자신의 존재성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서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31절에 보면 에발 산에 단을 세울 때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단'을 세우라고 합니다. 신 27:5,6절을 보면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로 단을 세우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철연장으로 다듬은 것은 안되고 돌이나 나무 연장으로 다듬은 것은 된다는 얘기입니까? 돌은 철연장으로 다듬지 돌이나 나무로 된 연장으로 다듬은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연장 종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다듬지 말라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다듬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도와 노력과 공적이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듬지 아니한 돌로 단을 세운다는 것은, 인간의 죄가 해결되는 현장에는 인간의 노력과 공적이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 쪽에서 그 어떤 착함과 종교적 헌신과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이 죄를 해결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듬지 아니한 돌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은, 죄란 희생 제물의 피만 가릴 수가 있는 것이고, 그 피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번제물이 되시고 화목제물 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화목하신다는 것을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내세우고, 주일성수를 자랑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한 우리의 행위를 의로 여긴다면 그것은 곧 우리 손으로 다듬은 돌로 단을 쌓는 것이 되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그리심 산에 서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복이 어디에 임하느냐는 것입니다. 흔히 복은 그리심 산에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심 산은 복을 받는 장소가 아니라 축복을 선포하는 장소입니다. 축복을 선포하면 그 복은 맞은편을 향해 갑니다. 즉 저주 산인 에발 산에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에발 산에서 선포한 저주는 반대편인 그리심 산으로 향합니다. 결국 복과 저주가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이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저주받을 자임을 아는 그 자리에 임합니다. '내가 바로 죽을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자기를 치는 그 자리가 복의 자리입니다. 복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복이지 않습니까?

그리심 산에서 선포한 복이 에발 산에 떨어진다는 것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저주받아야 할 자임을 알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는 것이 곧 복입니다.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은 이점을 잊으면 안되었습니다. 아이 성을 자기들의 힘으로 공격했던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떻다는 것은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고 자기들 뜻대로 행동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간을 죽이심으로서 죄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린 저주받아야 할 인간입니다'는 것을 알고 저주에서 자신들을 건져줄 희생 제물의 피를 바라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해보겠다는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저주받을 인간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겸손이 곧 여러분이 생명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인간은 참으로 불쌍한 존재임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고생하며 산다고 해서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다는 것이 인간의 불쌍함입니다. 그 죽음을 해결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불쌍한 자로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신자됨이며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저주를 아는 자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게 되고 주님만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된 여러분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죽어 가는 몸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 가는 몸이라고 할 때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복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