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면 동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라는 것을 부여받게 됩니다. 곧 국가라는 조직에 등록하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싫든 좋든 조직의 일원으로 소속이 되고 자라면서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을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 조직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법 등에 대해서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 일을 담당한 곳이 소위 학교라는 곳이며, 학교에서는 '도덕'이라는 과목으로 조직원이 조직을 위해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혹 조직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조직폭력배'를 연상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말씀드린 조직은 '국가'를 의미한 것입니다. 국가 역시 하나의 집단이고 조직이며 그 조직을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해서 부강한 조직으로 키우자는 것이 모든 조직원의 소원이고 그 일을 담당하는 전문가로 모여진 것이 정부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금 국가 체제를 부정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체제를 비판하고 부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 체제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국가 체제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국가라는 조직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대한민국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로 떠난들 국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조직을 떠난다고 해도 또 다른 조직에 소속되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이민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은 대한민국이란 조직을 떠나서 미국이란 조직으로 가입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란 조직 안에서는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좀 더 힘이 되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조직으로 가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인간은 조직, 곧 국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국가에 소속된 것을 죄로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국가에 소속된 것이 죄라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국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 되버립니다. 국가라는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싸운 혁명가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국가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조직을 위해 사는 것을 부정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자기 나라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고 현재 몸을 담고 있는 조직, 곧 국가를 지향하고 살아가는 삶을 죄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이란 종교 단체가 국가 정부 자체를 사탄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주민등록번호라는 것이 있는 이상 이미 국가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국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국가를 사탄이라고 한다면 결국 그들 자신은 스스로 사탄에 소속된 일원이라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직은 오직 조직을 보호하고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는 때로는 개인의 자유도 구속을 받습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피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장소에서 피워야 합니다. 담배꽁초 역시 귀찮다고 해서 아무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허락이 되되 술을 마신 후에 고성방가를 하면 안됩니다. 차를 탔을 때는 과속을 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차가 다니지 않은 도로라고 할지라도 국가에서 지정한 속도를 넘어서면 과속이라는 이름으로 과태료를 내야 합니다. 차를 사는 것은 자유이고, 차를 타고 가는 것도 자유지만, 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발부하는 면허를 받아야 하고, 또 정해 놓은 규칙에 복종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조직의 질서를 유지하고 지키고 발전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일정부분 박탈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인간도 자유롭게 산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조직에 매인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은 어떤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국가의 법에 매어 사는 입장에서 벗어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국가라는 체제를 부정하거나 국가의 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활동하신 혁명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뭔가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고 자신들에게서부터 잘라내야 한다는 긴장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집단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일하신 것도 아니고 국가의 법을 부정하는 말씀도 하지 않은 예수님을 왜 죽인 것입니까? 그것은 국가라는 집단이 지향하고 살아가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조직을 지향하고 사는 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삶이었습니다. 조직에 복종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만 복종하셨고, 조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조직이 구성된 사고방식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자기들의 사고방식에 연합하지 않았다는 것이 죽어야 할 이유였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생활이 무엇이냐가 드러납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떤 사고방식에 연합되어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늘나라 사고방식에 연합되어 살아가는 자는 신자이지만, 하늘나라가 아닌 세상 사고방식에 연합되어 살아간다면 그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늘나라 사고방식은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영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하늘의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개인의 인생은 생각하지 않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지향하신 것은 하늘이었지 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늘을 지향하는 삶은 자기를 지키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과 연합한 삶이 아니라 하늘과 연합해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에게서 보여져야 할 삶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브온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멀리서 온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 가면서까지, 그리고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자처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하고자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9:24절에 보면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땅을 모두 이스라엘에게 주신 일에 대해서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여리고와 아이 성의 멸망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은 기브온 거민만이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1,2절에 보면 "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고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은 가나안의 주변 지역의 거민들도 같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브온 거민들은 그 연합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종으로 자처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고자 했던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의 이러한 행동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본명 배신입니다. 가나안 거민이 이스라엘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연합한 것은 하나의 조직을 결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적하기 위해서 힘을 하나로 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연합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분명 조직에서 볼 때는 배신입니다. 힘을 하나로 모아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자는 계획에서 벗어나 오히려 하나님에게 굴복하기로 한 것은 가나안 거민들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처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의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짓으로 화친을 하도록 조장한 기브온 거민들이 과연 옳으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그들이 꾸민 거짓에 속아넘어가서 화친을 하고 맹세를 해준 여호수아는 잘못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점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윤리적인 면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의 잘못을 말하기 위해서 있는 내용도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단지 화친을 통해서 살아난 기브온 거민을 통해서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지 기브온 거민의 행동이 우리에게 어떤 신앙을 말해주느냐만 생각하면 된다고 여겨집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을 제멋대로 결정한 잘못으로 규정한다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어야 마땅한데 본문에서는 여호수아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를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브온과의 화친을 결정하고 '그들을 살리리라'(15절)는 언약을 맺고 족장들까지 맹세한 것으로 인해서 결국 기브온 거민이 이스라엘에게 연합되고 살아나게 된 것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본문의 내용이 기브온 족속이 가나안의 연합에서 탈퇴하여 이스라엘로 연합된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관심을 여호수아의 잘못이나 기브온의 거짓말에 둘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하려고 했던 기브온 거민들의 태도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들의 모습은 라합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여호수아에게 거짓말을 했고, 라합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동족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소문을 듣고 여호수아를 찾아온 것처럼 라합 역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기브온 거민들이 하나님 편에 연합되기 위해서 같은 가나안 거민들과의 연합을 탈퇴했고, 라합은 자기 동족들을 배신한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브온이나 라합이나 똑같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하신 것들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고 가나안 땅 모든 거민을 멸하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분명히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브온 거민들은 이스라엘이 온 것은 곧 자기들에게는 멸망이며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한 살길은 이스라엘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편에 연합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앎이 곧 삶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거민들과의 연합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에게 연합되고자 한 것입니다. 비록 종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연합되는 것이 곧 살길임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다고 해서 모든 자가 그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문은 이스라엘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가나안 족속들도 다 같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거민들은 힘을 합해서 대항하면 이길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조직이라는 것도 힘을 뭉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힘을 모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어떤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기브온이 보여준 사고방식입니까 아니면 다른 가나안 족속이 보여준 사고방식입니까? 즉 힘을 모아서 이기자는 방식으로 모이는지, 아니면 우리 힘 모으기를 포기하고 종으로라도 하나님 편에 연합되는 것만이 사는 것이라는 방식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볼 때 교회는 기브온 족속이 아니라 다른 가나안 족속의 사고방식으로 모이고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은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이 아니라 단지 힘모으기에 불과한 연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회, 총회가 바로 힘모으기입니다. 각 교단이 연합된 교단의 힘을 과시하는 것들이 바로 그 증거이지 않습니까? 노회 총회는 조직이라는 힘을 교회에 또는 목사에게 과시합니다. 그래서 목사도 노회를 돕고 노회를 위하는 목사로 존재해주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노회가 추구하는 사고방식에 위배되는 목사라면 가차없이 조직의 힘을 가합니다. 목사는 목사라는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회나 총회가 바라는 요구대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라는 위치를 자기의 살길로 여기기 때문에 살길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회나 총회에 연합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직을 통해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것이 죄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세상 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을 연합해서 자기 이름을 내고 발전하고 높아지고자 하는 것은 바벨탑입니다. 십자가와 원수된 삶의 태도입니다. 인간의 존재 근거는 힘의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통해서 그것을 알았고, 다른 거민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과 대적하기 위해서 연합한 족속이 모두 여섯입니다. 여섯 나라의 왕이 힘을 연합한다면 그것은 사실 무시할 수 없는 힘입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눈에 보이는 뭉쳐진 힘을 더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소문일 뿐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줬다는 것도 그들이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소문으로 들린 것뿐입니다. 여리고와 아이 성을 이겼다고 하지만 여섯 족속이 힘을 모은다면 여리고나 아이 성의 힘보다는 더 강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줬다는 소문만 믿고 연합된 힘을 포기하고 이스라엘에게 종으로라도 연합되기 위해서 화친을 맺고 한 것은 분명 세상적인 시각에서는 어리석은 것이고 비굴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그것이 바로 멸망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신앙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여리고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아이 성을 자기들의 힘을 계산한 후 스스로 아이 성을 치고자 했던 것에 비하여 기브온 거민들은 자기들의 힘이 아닌 여섯 족속이 연합된 힘에 대해서도 승리의 가능성을 포기한 채 오직 하나님께 연합되고자 한 그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자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서 보여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친척 아비 집이라는 것은 연합된 힘이 있는 곳입니다. 가문이라는 힘이 아브라함을 보호하고 지켜줬던 것입니다. 그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인간의 연합된 힘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이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다 낡아서 기운 신발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곰팡이 핀 떡을 가지고 여호수아에게 와서 거짓으로 멀리서 온 것처럼 가장을 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을 하고자 했던 것은 기브온 거민들이 소문으로만 들은 하나님은 이미 그들 가슴속에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실 기브온 거민들의 거짓 화친은 이스라엘에게 많은 부끄러움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은 단지 소문으로 들은 하나님이지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직접 계시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홍해를 통해서 요단을 통해서 그리고 광야에서의 여러 가지 기적과 삶을 통해서 능히 나타나신 바 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장 아이 성의 전투만 해도 하나님이 절대적인 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면 결코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제멋대로 아이 성을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브온 거민이 이스라엘에 연합되어서 함께 산다는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교훈 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긷는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여호수아에게 거짓말한 기브온 거민에 대한 징계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브온 거민의 입장에서는 영영히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나무를 패고 물긷는 자가 된다는 것은 분명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은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25절)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당신들 손에 있으니 당신들 마음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브온 거민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에 연합되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지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아가느냐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속했으니 이스라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태도입니다. 비록 기브온 거민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패는 일을 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레위인처럼 여호와의 단을 섬기고 그 백성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제사하러 나온 이스라엘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만이 좋았을 뿐입니다. 가나안을 멸망하시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멸망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산다면 비록 종으로 산다고 해도 괜찮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브온 거민들과 우리 자신을 비쳐 볼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과연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이 망한다는 소리를 말씀을 통해서 들었는데 과연 망함 속에서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연합되는 것임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까? 그리고 하나님께로의 연합이란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십니까? 하나님께 연합된 자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하셔도 좋다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은 인간의 연합된 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힘이 곧 의지의 대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절대자로 자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의 모습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힘이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태양 앞에서 반딧불 같은 것이 인간의 힘입니다. 그 힘을 의지하고 살아보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것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비록 종으로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 속해있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마음 든든히 여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신자가 굴복할 것은 세상 힘이 아니고 조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신앙이라면 비록 몸은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매인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매인 자로 살아갈 것이고, 그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만 마음껏 보이며 살 것입니다.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