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땅은 분명 약속의 땅이며 축복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투가 끊이지 않습니다. 축복의 땅이라면 편안하게 두다리 뻗고 아무 걱정 없이 놀고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인데, 하나님이 마련하신 축복의 땅은 인간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서 이제 그동안의 모든 고생이 다 끝나고 편하게 사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것이 전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축복의 땅은 편안하게 놀고 먹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의 땅은 그런 차원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축복의 땅은 승리의 땅입니다. 승리가 주어져 있는 땅이 곧 가나안 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전투를 하게 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승리 안에 들어왔음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힘으로 승리해야 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승리하게 하신 땅에 들어왔음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전투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리고 전투가 바로 그런 의미이며 아이 성 전투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를 이스라엘에게 붙이셨고 아이를 붙이셨다면 그것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싸우나 마나 이미 승리했는데 왜 굳이 이스라엘에게 여리고를 돌게 하시고, 아이 성을 쳐부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여리고를 도는 것조차도 없이 승리를 안겨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아이를 이스라엘에게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승리의 땅에 들어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의 싸움을 통해서 '이 땅은 너희들의 힘과 노력으로 승리하고 살아가는 땅이 아니라 이미 승리가 주어져 있는 땅이다. 너희는 단지 승리를 누리며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싸움이 없으면 이스라엘이 승리를 누리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지를 확인하지 못합니다. 전투가 있어야 자신들이 하나님의 축복의 땅 안에 있기 때문에 승리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땅에 전투가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으로 아이 성을 치고자 했을 때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는 것은 곧 실패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의 나약함은 이미 승리한 자로 살아가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축복의 땅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 안에서 실패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이긴자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나는 이긴자다'라고 한다고 해서 이긴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과연 이긴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전투를 통해서 확인하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을 우리 앞에 두심으로서 적의 힘에 흔들리지 않고 이미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나안 땅에서의 전투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축복의 땅이란 세상 것을 받아 누리는 땅이 아닙니다. 축복의 땅은 하나님의 승리가 주어져 있는 땅입니다. 그 땅에서 산다는 것은 이미 승리한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신자가 바로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미 승리한 자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믿음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도 아니며 뭘 하고 안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따라서 만약 신자가 진심으로 축복의 땅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약한 자로 산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실패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과연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시기 위해서 전투가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가나안 땅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스라엘과 화친을 하고자 했던 기브온 거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군사를 몰살시키고 여리고와 아이를 멸하신 그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줬다면 그 약속대로 틀림없이 되어질 것을 전혀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자신들의 군사력과 이스라엘의 군사력을 비교하고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화친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의 연합도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들은 자신들의 힘과 이스라엘의 힘을 비교하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라면 가나안은 틀림없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 길은 이스라엘과 연합하는 것 밖에 없음을 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브온을 통해서 보여준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계산하고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연합한 기브온을 치기 위해서 예루살렘왕 아도니세덱이 아모리 다섯 왕과 연합하여 기브온을 대적하는 내용입니다. 기브온 거민들의 행위는 세상이 볼 때는 배신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다른 거민들을 외면해 버린 비열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신의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의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아도니세덱은 배신자를 척결하기 위해서 아모리 다섯 왕과 힘을 모아서 기브온을 치게 됩니다. 그 내용이 10:4절입니다.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 하매"라고 합니다. 원래 이들의 적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마저 이스라엘과 같은 존재로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기브온마저 공격해야 할 적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과 연합해서 살고자 했던 기브온은 그 댓가로 전에는 자신들과 같은 가나안 거민이었던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자들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이 하나님을 알고 나서 하나님께 굴복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 역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작정한 자들입니다.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만 믿고 살기로 작정한 자가 곧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를 세상이 가만히 놔두지 낳습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세상도 의지하고 그리스도도 의지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고 살고자 하는 신자에게는 필히 세상의 미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자 역시 미움을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기브온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더라도 화친을 하고자 했던 그 마음이 전혀 거짓이 아니었음이 드러납니다. 만약 기브온 거민들에게 조금이라도 세상의 힘에 마음을 두는 부분이 있었다면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보다는 가나안 거민들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들은 여호수아를 찾아와서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에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언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6절)라고 말합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기브온 거민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한 자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는 말을 많이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으로 들통이 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어떤 외부적인 압력이 가해졌을 때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공격을 받을 때 우리는 흔들릴 때가 많이 있으며 세상 쪽으로 우리 마음을 조금 양보하고자 하는 흔들림도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투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의 약함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는 신자라면 그 어떤 일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향해 달려올 것입니다.
기브온의 요청에 의해서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서 길갈에서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도니세덱의 연합군들이 여호수아에 의해서 패배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도망을 치게 되고 하나님은 도망치는 그들 머리 위에 큰 우박덩어리가 떨어지게 해서 이스라엘이 칼로 죽인 수보다 더 많은 수가 죽게 하십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태양과 달이 멈추게 된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태양과 달이 멈추기를 기도하자 그 기도대로 태양과 달이 멈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과연 세상 누가 믿겠습니까? 태양과 달이란 인간에 의해서 통제될 수 없는 물질입니다. 인간은 오히려 태양과 달이 일으키는 자연의 변화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세상은 태양과 달을 만드신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태양을 보고 달을 바라봤습니다. 그럴 때 인간의 눈에 태양과 달은 섬김의 대상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태양과 달이 멈췄다는 것은 세상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상식이 아닌 과학으로도 전혀 답을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것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놀라운 기적을 신화라는 말로서 약화를 시키려고 하고 또는 일식이나 월식 같은 현상을 멈춘 것으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과학적인 절충을 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태양과 달이 실제로 멈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컴퓨터로 계산을 해보니까 한시간이 비더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 모두는 쓸데없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들이 세상에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기적을 베풀어서 기적에 감동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단지 태양과 달이 머물렀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는 것이고, 왜 하나님이 태양과 달을 머무르게 하는 기적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셨는지를 알아 가면 되는 것이지, 이것이 사실인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것은 결국 기독교라는 종교적 자존심을 세워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남들이 기적을 사실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태양과 달이 정지할 수 있느냐? 에 대한 의문은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정지한 것이 사실이라면 오늘은 왜 태양과 달이 정지하는 기적이 없느냐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기적에 대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기적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은 단지 계시를 담고 있는 그릇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 때 있었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면 되는 것이지, 꼭 오늘 우리도 기적을 목격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실제로 세상 사람들 눈앞에서 태양과 달이 멈춘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놀라운 기적에 감탄할 것입니다. 기적에 매이고 되고 기적을 바라보게 될 뿐이지 기적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지 기적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태양과 달이 정지한 것보다도 더 큰 기적과 힘은 곧 성령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양과 달이 정지한 것보다도 성령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자 된 것이 더 큰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태양과 달이 정지한 기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십니까? 하나님은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해서라도 기브온 거민을 공격하는 무리들을 진멸을 하십니다. 그만큼 기브온 거민들을 높이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브온 거민들이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곧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문을 들은 기브온은 자신이 살길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되는 것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세상 힘이 자신을 보호할 수 없고 하나님 편 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으로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편이 아니라 자기편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인간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으로 살기를 작정한 기브온을 보호하기 위해서 태양과 달까지 정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태양과 달이 정지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의지로서 일을 하시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기적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자신이 무능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로만 살 수 있음을 아는 신자는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안 땅의 의미입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제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사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땅에 들어왔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다만 약속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살며 되었습니다.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바꾸시지도 않으시고 취소하지도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강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약속에는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태양과 달을 정지하게 해서라도 약속 안에 있는 자는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라면 신자가 약속 안에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엄청난 능력과 힘과 축복 안에 들어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브온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하나님 편에 서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곧 사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한번 약속한 이상 그것을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만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브온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화친조약이 취소된다면, 결국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 약속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24,25절에 보면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군장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가까이 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군장들로 하여금 아모리 왕들의 목을 밟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그들을 죽여서 나무에 매달아 놓습니다. 이것이 어찌 보면 잔인하고 인간적이지 못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모리 왕들의 목을 밟게 하고 그들을 죽여 나무에 매달아 놓음으로서 이스라엘의 대적에게는 하나님이 이같이 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과연 목을 밟히고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이고, 목을 밟은 자는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의 목을 밟고 죽였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어떤 마음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목을 밟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목을 밟힌 자들은 끝까지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대해서 들었으면서도 자기들의 힘을 모아서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세력에 대해서 하나님은 목을 밟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세력을 목이 곧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곧은 목을 밟아 버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목을 밟아버리는 인간과, 태양과 달을 정지하게 해서라도 보호하시는 인간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목을 밟아 버리는 인간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사는 자입니다. 인간들끼리 힘을 모으고 열심히 하면 자기들 계획대로 되어질 것 같은 착각으로 사는 자는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그 목이 밟힐 자라는 것을 잊으며 안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피안에 구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피를 믿는 자는 절대로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내가 착하기 때문에 되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선물이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겸손으로 사는 자를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신자가 바로 그러한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지된 태양과 달에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태양과 달이 정지된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고자 했던 기브온이 태양과 달이 정지되면서까지 보호받는 세계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위해 태양과 달이 멈출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호수아 때 한번으로 족합니다. 왜냐하면 그 한번으로 신자가 살아가는 축복의 땅이 어떤 땅인가가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오후예배 찬송 / 404 장 기도 / 이길우 전도사 성경봉독 / 롬 8:31-32 설교 / 64강 무슨 말하리요 기도 / 설교자 찬송 / 205 장 폐회 / 주기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