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교회에 다님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다고 간주해 버립니다. 자신의 삶이 과연 사랑과 은혜 안에 있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랑과 은혜는 이미 이루어졌으니까 이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어려울 때, 어떤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소유 증가와 편안한 삶을 통해서 확인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미 증거 되어지고 확인되어 졌습니다. 사랑의 증거는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이 윤택해진다거나, 하는 일이 순조롭게 잘되어 간다거나, 자식들이 모두 속 안썩이고 공부 잘하는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결국 어려움이 있고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하게 되면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기 삶에 대해서 욕심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내 삶에 대해서 욕심을 두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욕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에 대해서 욕심을 두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현재 자신의 삶이 욕심으로 나아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삶의 윤택함을 통해서 확인하려는 것은 결국 삶에 대한 욕심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하나님의 사랑을 내세워서 채워 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고 예수님의 피를 말하지만 그 속마음은 온통 자기 삶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삶의 중심이 자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만약 사랑을 세상에서 윤택하고 풍족하게 사는 것이라면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입니까? 지옥간 부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까? 사랑이란 우리의 소유와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로 증거 되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주어졌고,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서 그는 이미 사랑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 사는 자는 세상에서의 자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공해야 한다거나, 남들보다 더 높아져야 한다거나, 자식들을 출세시켜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알았고, 또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이미 인생의 성공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부흥이 예수님의 피보다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피를 믿게 된 것을 감사한다고 하면서 교회가 부흥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염려를 하고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비록 예수님의 피를 말은 하지만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 안에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목이 곧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기브온 거민을 공격하던 아모리 다섯 왕이 여호수아에 의해서 죽는 내용입니다. 아모리 다섯 왕은 이스라엘에 의해서 패배를 합니다. 그리고 도망을 치던 중에 굴에 숨게 되었는데 여호수아가 그것을 알게 되고 결국 그 다섯 왕을 끌어내어서 군장들에게 목을 발로 밟으라고 명하고 죽여서 나무에 달아 놓는다는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태양이 멈추었던 기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다섯 왕의 목을 밟아라고 명한 것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 목을 밟아라는 것은 목을 꺽어버리는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대 앞에서 다섯 왕을 이렇게 처리를 하는 것은 다섯 왕과 같은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이렇게 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단지 기브온을 공격하는 무리들을 물리치고 기브온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모리 다섯 왕을 그토록 잔인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살려둘 수는 없다고 해도 그냥 곱게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수아의 행동은 마치 원수를 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다섯 왕에게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다섯 왕과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아모리 다섯 왕이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을 공격한다는 것이 여호수아를 분노하게 했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여호수아의 행동을 그런 쪽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도 우리로서는 여호수아의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 속에 인간의 도덕과 윤리와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도덕과 윤리와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것도 결국 인간을 도와주고 어려움에서 건져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어떻게 그런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자기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위치에 있습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자기 개인의 감정과 생각으로 행동을 했다면 아마 다섯 왕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에 다섯 왕의 목을 밟고 죽여서 나무에 달아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섯 왕의 목을 밟아라는 여호수아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목을 밟는다는 것은 목을 꺾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을 꺾는다는 것은 목이 곧은 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목이 곧다'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2장에서 처음 나옵니다. 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 동기는 모세가 산에서 늦게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늦게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한 모세를 대신해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을 모아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말하기를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눈에 보일 때는 마음이 든든하고 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할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즉 모세를 대신할 다른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시고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송아지 형상을 만든 것은 자기들 스스로 자신들이 의지할 것을 만들어 내는 행동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들 앞에 둠으로서 힘을 얻으려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이적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세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가 눈에 보일 때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눈에서 보이지 않자 마치 하나님도 자기들에게서 떠나신 것으로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서 그 속에 하나님을 모셔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이고 목이 곧은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자신의 삶의 윤택과 풍족함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담아 두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랑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의 사랑도 우리의 삶에 실제로 드러나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현재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이 곧은 모습입니다.
세상은 오직 보이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신이라는 존재 역시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고 증명하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서 증명되어지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복음을 교회의 부흥이나 자기 성공으로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증거하면 부흥되게 되어있다든지, 복음으로 살아가면 복을 받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목사가 '구속사 설교를 해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더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목사는 소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한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뿐입니다. 구속사 설교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 설교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을 두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속사 설교를 해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더라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도 돈이 안되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십자가를 전해도 그것이 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되기는커녕 우리를 손해되는 길로 밀어붙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 전하면 교회가 부흥될 것이라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런데 구속사 설교를 해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교회가 부흥되게 하는 설교가 진짜 설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의 증거를 교회 부흥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실과 관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하나님,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설교,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오로지 눈에 보이는 현실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이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목이 곧은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자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아모리 다섯 왕의 목을 밟음으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모리 다섯 왕은 기브온이 자기들과의 연합을 배신하고 이스라엘과 화친을 했다는 이유로 서로 힘을 합하여 공격을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힘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신보다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군병과 힘을 최고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목이 곧은 모습인 것입니다.
신명기 9: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목이 곧은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이 곧은 자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으로 감사하고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 가나안 땅에서 부강해지는 것으로 확인되어지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은혜 안에 있음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한다는 사실로 이미 확인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눈에 보인 것을 바라보게 되어질 때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게 될 것이고 결국 가나안땅에 들어온 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시해 버릴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에도 보기에 힘이 되고 소망이 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것만 나에게 있다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것만 있으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우리들 주위에 산더미처럼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주어졌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내게 있음을 인정하겠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사는 이웃을 보면서 '하나님 도대체 뭐합니까? 열심히 교회 다녀주고 헌금했으면 뭔가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무시하고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목이 곧은 모습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다섯 왕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목이 밟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목이 밟히는 것이 아니라 목을 밟은 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목이 밟혀야 할 자인데도 불구하고 목을 밟는 자로 서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살아난 자들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있는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의로 삼는 자들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고 피만 의로 내세워야 할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섯 왕의 목을 밟으면서 확인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즉 우리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목이 밟혀야 할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을 자각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목을 밟는 그 심정으로 밟아야 했던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아마 군장들이 다섯 왕의 목을 밟기를 꺼려했던 모양입니다.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다섯 왕의 목을 밟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해서 목을 밟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희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이같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목을 밟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얼마든지 다섯 왕의 목을 밟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이 어떠함을 알 때 세상의 악함과 나 자신의 악함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흔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는 것을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마음가짐이라고 여깁니다. 인간의 신념이나 의지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곧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오히려 세상이 의지하는 것을 무너뜨리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소원하고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을 부인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세상에서 힘되는 것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단절된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들을 부인하고 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가능한 것이고, 그 마음이 곧 강하고 담대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 마음이 누구의 목을 밟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목을 밟습니다. 우린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바로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온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염려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지혜를 주셨다면 그것으로 이미 기적의 세계를 살아가고 축복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은혜와 사랑을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려고만 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목이 곧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목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밟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밟아야 할 자는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세상의 보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며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은 기적의 세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만 자랑하게 되고 누구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모독하고 인간의 의를 드러내고 보이는 것으로 은혜를 확인하려는 것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강하고 담대한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