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끝과 종말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죽음, 이 문제보다 더 현실적이고 시급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이 문제는 현재의 인간이 어떤 형편에 놓여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무리 인간이 발버둥치고 살아보려고 애를 써도 결국 죽음이라는 굴레 안에서 활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죽음으로 향해 가는 운명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그러나 죽음이란 신이 정해준 원칙이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죽음을 이기는 의학 역시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간의 수명 앞에서는 의학도 두 손을 들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죽음 안에 놓여서 살아가는 운명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자기 죽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늙었다거나 병들었다거나 해서 죽음의 위기를 느끼는 상황이라면 간혹 '죽는다'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도 하겠지만, 건강하다거나 젊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마치 죽음과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죽음은 늙은 사람들이나 생각할 문제이지 나같이 젊고 건강한 사람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염세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이 현재의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은 마지막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끝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오직 희망이 있고 꿈이 있는 세상을 가르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나중에 죽게되었을 때나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팔팔할 때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 비생산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교회가 마치 천국을 싫어하고 있는 뜻한 느낌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고통과 수고의 세상으로부터 떠나서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는 세상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찬송가 289장에서도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290장에서도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라고 말합니다. 이 찬송가를 보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간다는 것은 아주 큰 기쁨과 영광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 찬송을 부르면서 과연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며 부르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진심으로 세상을 고통과 수고의 현장으로 여기고, 죽는다는 것을 고통과 수고로부터 해방되고 영원한 영광과 평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긴다면 교회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고,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은 천국보다는 세상에 더 미련을 두고 소망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 4:13-14절에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끝에 대해서 외면하고 오직 자신이 위대해지기 위해서, 자신을 위하고 자기 가족을 위해서 한평생을 희생하고 봉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할 대상이며 하나님의 원수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러한 이치를 모른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교회가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거의 날마다 성경이 해석되고 전파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상이 어떻게 끌고 가시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원수로 삼고 추방하고자 하는 대상이 어떤 자인가에 대해서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이 성경인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는 교회가 도리어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할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은 날 때부터 죽어있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끝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 32:29절에 보면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지혜로 인정하지 안습니다. 세상이 지혜로 여기는 것은 남들보다 더 위대해지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며 수단입니다. 그것만이 지혜로 통용되는 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부흥되어지고 사람들을 많이 끌어 올 수 있는 방법이나 수단들이 지혜로 통용됩니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인간의 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회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존재로 내몰리는 결과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패배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고, 한쪽 면만 강조하고 긍정적 면을 보지 않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로 여김 받을 것입니다. 사회에 불안감을 조장하는 말이라고 할 것이고, 나중의 문제를 지금 미리 끌어 당겨서 생각함으로 희망과 꿈이 있는 소망의 삶에 대해서 찬물을 끼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인간은 물론 죽지만 현재 하나님이 살게 하신 것도 결국 삶에 대해서 가치를 주신 것이니까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데 죽음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인간에게 죽음이 왜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무지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끝이 있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삶은 끝을 알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을 모르게 되면 자기 삶에 희망을 두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보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할 때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여겨지면 스스로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부각시킵니다. 이만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삶에 만족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만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추어버린 결과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께 만족이 되고 기쁨이 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성자라고 일컫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도 다 죽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아버지 슈바이처도,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로 일컬음 받은 테레사 수녀도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슈바이처의 선행도, 테레사 수녀의 선행도 모두 하나님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곧 하나님이 인간을 받지 않으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곧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현실은 끝, 곧 죽음이라는 것을 두고 볼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알고 죽음을 생각하고 사는 자에게 죽음에서 해방이라는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시간에 우리는 그 귀하고 가치 있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여호수아가 군대를 이끌고 가나안의 남부 지방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가 전쟁을 치르고 점령을 한 도성은 막게다, 립나, 라기스, 게셀, 에글론, 헤브론, 드빌과 가데스 바데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렀습니다. 한마디로 가나안 땅을 초토화 해버린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많은 가나안 백성을 쳐서 이겼다라는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약 본문을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많은 나라를 점령했다'라고 생각해 버리면, 결국 '하나님 나에게도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해 주십시오'라는 바램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이기게 해달라는 것도 자신의 경쟁자를 물리치게 해달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것을 세상의 많은 것을 점령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탐욕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생각입니다. 탐욕으로 살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내용을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쪽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 한국교회가 이런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모든 성경의 내용이 결국 인간을 도와주고 인간 편을 들어주는 긍정적인 하나님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편을 들고 인간을 도와주는 긍정적인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진멸해 버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야 가나안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자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을 결국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믿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은 인간 편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 편에서 일하신다면 비록 이스라엘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우상을 섬긴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얼마든지 권면할 수 있습니다. 혹 권면을 듣지 않는다면 가벼운 징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의 고생 끝에 들어가게 된 가나안에서 나가게 하신다는 것은 너무 몰인정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몰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 편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사는 거민들을 초토화시켜 버립니다. 그것은 가나안 거민들이 미워서 보복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서의 기능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은 아무나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약속 안에 있는 자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 안에 있지 않는 자는 모두 진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위해서 일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맞지 않는 자는 모두 진멸해 버리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공통적인 문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8절 하반절에 보면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립나를 진멸하고 나서도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고 말합니다. 라기스를 진멸하였을 때는 "립나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고 말하고 에글론을 진멸하고 나서는 "라기스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는 말을 합니다. 즉 앞서 행한 것과 똑같았더라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전투는 처음과 나중이 모두 같았습니다. 이것은 어떤 지시에 의한 전투였음을 말해줍니다. 즉 여호수아 자율에 맡겨진 전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40절의 말씀입니다. 40절에 보면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의 전투에서 처음과 나중이 동일한 것은 '진멸'이었습니다.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는 것이 곧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심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여호수아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진멸에 있습니다. 그 뜻을 도와주기 위해서 5장에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행한 것이나 모든 전투가 일반이었다는 것은 자기 개인의 뜻을 가지고 전투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 전투를 했음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천사가 여호수아를 도와주는 것은 여호수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편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세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기도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뜻이 포기되어 있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신자야말로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런 물음 앞에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삶은 여호수아의 전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멸'입니다. 진멸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하신 것이었고 여호수아는 그 명하신 대로 모든 전투에서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진멸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삶이란 '진멸'하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수아처럼 총칼 들고 나가서 세상 사람을 다 죽여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전투에서의 진멸이란 단순히 모든 사람을 죽였다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본문은 우리의 현실과는 전혀 거리가 먼 내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가나안 거민들을 모두 진멸하는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아주 못된 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고 제물을 바치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오직 약속 안에 있는 자들만이 가나안 땅에 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 안에 있지 않는 자는 진멸 하는 것입니다. 즉 약속 밖에 있는 자는 모두가 진멸을 당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약속 안에 있다, 약속 밖에 있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약속 안에 있는 자는 약속을 아는 자들입니다. 약속을 알고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약속 밖에 있는 자는 약속을 모릅니다.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주와 능력과 자질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나안 거민들은 약속의 땅에 있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기준은 도덕과 윤리가 아닙니다. 세상이 생각하듯 도덕적인 착함과 악함을 기준으로 해서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악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은 지옥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약속의 자손을 세상에 보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인정하는 자를 약속 안에 있는 자로 여기십니다.
시 2:2-12절을 보면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자로 오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는 모두 진멸해 버리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철장으로 깨뜨리시고 질그릇처럼 부숴 버리십니다. 구원의 기준은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 거민들이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들, 즉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모르기 때문에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더럽히는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땅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을 진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 밖에 있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이 명하신 것과 일반이었더라'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기준이 '하나님은 약속 밖에 있는 것은 모두 진멸하신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전투는 호흡이 있는 자는 모두 진멸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 전체를 심판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창 7:22절에 보면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육지에서 코로 호흡하는 생물은 모두 진멸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심판에서 오직 살아남은 자는 노아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살리신 것은 이들이 구원을 받을 만큼 착하다거나 의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창 6:8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와 그 가족을 살리신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림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즉 죽어야 할 인간이 정결한 존재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은 죽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것을 아는 자만 인정합니다. 그 외의 모든 인간은 진멸해 버리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는 신자라면 세상을 이런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가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해 버리신 것은 새로 시작하자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새롭게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재주로 만들어 놓은 문화나 문명으로 사는 세상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세상으로 새롭게 시작하자는 것이 홍수로 진멸하는 것이었습니다. 홍수는 인간의 모든 것을 싹쓸이 해버렸습니다.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문화라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만 물위에 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심판의 현장에서 생명이 되는 것은 '은혜'일 뿐입니다. 더 이상의 것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오후예배 찬송 / 337 장 기도 / 조순자 집사 성경봉독 / 롬 8:35-39 설교 / 66강 사랑 기도 / 설교자 찬송 / 412 장 폐회 / 주기도문 |
가나안 거민을 모두 진멸하신 것은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십니다. 인간의 것은 모두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만 세워서 새롭게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신다면, 우리의 것을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과거에 우리가 무엇을 했든지 간에 그것은 진멸을 당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진멸을 당한 자로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것을 진멸 당하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은혜만 덩그라니 남아있는 자로 나오셔야 합니다. '은혜가 나를 살렸습니다' 이것 외에 내세울 것은 없습니다. 내세울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업적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진멸을 모릅니다. '끝'이란 인간의 종말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오직 자기 인생을 위해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삽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깨끗이 청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 약속 안에 있는 자만 세우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진멸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만이 여러분을 살립니다. 자신을 진멸 당할 자로 알고 나오십시오. 그럴 때 은혜가 보일 것입니다. 죽어야 할 내가 살게 된 은총이 무엇인가가 보여질 것입니다. 그 은총을 증거 하는 자로 남은 인생을 보내는 것이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는 인생을 사는 자입니다.
세상은 진멸 당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나를 살렸다는 것을 귀한 축복으로 여긴다면 그는 세상의 시시한 것으로 경쟁하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언제나 당당합니다. 죽어야 할 운명인데 주의 은혜가 나를 살렸다는 것을 부지런히 증거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내 속에서 세상의 것은 진멸 당하고 주님의 은혜만이 우뚝 세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