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힘의 나라입니다. 힘있는 자는 우대 받고 높임 받으며 힘없는 약자는 무시와 업신여김을 당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어디를 가도 힘이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믿음의 차별성은 무엇으로 드러나겠습니까? 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비와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종교가 강조하는 자비나 사랑이란 힘을 가지고 남을 억압하지 말고 도와주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힘있는 자의 너그러움이고 여유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비나 사랑 역시 힘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소위 교회라고 하는 단체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힘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힘의 구조에 매인 채 힘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봉사 많이 한자와 적게 한 자의 관계 속에 힘이 형성됩니다. 즉 봉사를 많이 하는 자는 우대를 받고 봉사를 적게 하거나 아예 하지 못하는 자는 무시를 받습니다. 결국 우대 받는 자가 힘있는 자로 행세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힘있는 자로 군림하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히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으로 사는 세상에서 돈이 없는 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을 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교회가 단지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 하나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식당을 하기 위해서는 필히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백화점도 주차시설이 잘되어 있는 곳을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물건값이 싸고 음식값이 싸다고 해도, 주차 시설이 안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외면하고 맙니다. 교회 역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차 공간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교육관도 지어야 하고 이런저런 시설도 필요합니다. 또 '우리 교회는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오직 돈으로 모든 일을 하는 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무엇보다 헌금을 많이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즉 돈 되는 사람을 교회가 선호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교회에서 힘있는 자는 돈 있는 자이고 헌금을 많이 하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돈 되지 않는 자가 교회를 떠나면 관심을 두지 않는데 돈 되는 사람이 교회를 떠나버리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탈을 쓴 이리의 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은석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가 아닌지를 말씀을 통해서 면밀히 검토를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은석교회가 혹시 세상의 힘의 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오늘 우리가 말씀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설교란 좋은 말을 듣고 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말씀이 입에서는 달지만 속에 들어가면 쓰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입에서 단 말씀이 아니라 속에서 쓴 말씀을 체험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말씀 앞에 왔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말씀은 절대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지를 않습니다. 때리면 아파하는 것이 정상이지 맞으면서 웃고 즐거워하는 사람을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만약 맞으면서도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맞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경우일 것입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인간을 칩니다. 속의 죄를 드러내며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말씀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제대로 만난 자는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벌거벗음이 발각될 수밖에 없고 벌거벗음이 발각되었기 때문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수치가 드러난 현장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설교를 듣는 자에게서는 두가지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수치를 드러낸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에 의해 자기 수치를 철저히 인식함을 통해서 수치를 가려준 자로 오신 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즐거움은 바로 수치를 가려준 분을 바라보게 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수치가 발각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결국은 힘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속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약점을 철저히 감추려고 하는 것 모두가 힘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힘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봐야 결국은 힘을 주시는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영웅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약자로 오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약자로 오신 그리스도가 이해되어지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부여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믿음과 힘을 연결시켜 이해를 합니다. 믿는 것이 곧 힘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인데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 힘을 못 받는 것이니까 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속임수에 넘어간 교인들은 힘없는 자의 설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를 써서라도 하나님을 믿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성가대를 하고 교사를 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면서 믿음이 있는 자의 티를 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을 힘으로 삼지 않도록 합니다. 믿음은 신자더러 예수님처럼 약자로 살아가도록 합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신자더러 약자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자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하심이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사는 나라는 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선호하고 원하는 힘이 하나님에게는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4,5절을 보면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이 왕들이 모여 나아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함께 진쳤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남부 지방을 점령을 하자 이 소식을 들은 하솔왕 야빈이 북부와 동서 편에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이스라엘과 대항을 하기 위한 연합군을 결성을 합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많은 수의 군사와 병거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모여든 군사가 얼마나 많은지 해변의 수다한 모래처럼 많다고 표현을 합니다. 가나안 족속은 많은 수의 군사와 병거를 믿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이스라엘쯤은 문제없이 전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이스라엘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들보다 적은 수이고 무기도 하찮은 이스라엘이 보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소유한 것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누가 봐도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가나안 족속이 승리할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에 자신만만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가나안 족속의 패배로 끝납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약속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승리란 인간의 힘과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숫자와 보이는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끌어 모은 것은 하나님의 힘 앞에서는 지푸라기보다 못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을 힘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힘을 삼는 자는 절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일임하지 하지 않습니다. 힘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냥 따라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깁니다. 선교를 한다고 할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은 돈입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선교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구제 역시 마찬가지로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교회에 돈을 바치는 것이 해결책이지 그냥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신대로 한다는 것은 게으른 것이고 믿음이 없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인 숫자와 병거를 의지하고 이스라엘과 대적하려고 나온 가나안 족속과 같은 모습입니다. '돈만 있으면 해결되니까 하나님 돈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이것은 단지 돈 받아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힘이 아니라 돈을 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필히 교인 수와 재정의 액수를 과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보내는 선교사의 숫자와 구제를 하고 있는 숫자를 과시하면서 자신들의 능력과 힘을 즐거워 할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약자인 예수님은 절대로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환영을 받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가 아닌 자로 밀쳐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 있었던 상황이 오늘날 교회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음을 당했듯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에 의해서 참된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가나안 족속을 쳐서 진멸하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고 말 뒷발의 힘줄을 끊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말의 뒷발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것은 말이 제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투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의 병거를 불사르고 말의 힘줄을 끊어버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당초 이스라엘의 승리는 많은 수의 군사와 병거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이 남긴 병거와 말을 모은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의지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가나안 족속과 똑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 33:16,17절에 보면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구원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소망하고 모으기를 힘쓰는 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자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또 시 20:7절에서도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병거 말을 의지하는 것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자는 병거 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자랑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무슨 힘이 됩니까? 세상을 사는데는 돈이 더 힘이 되고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의 마지막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왜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망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힘에 대한 관심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는 것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이름에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병거나 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망령되이 일컫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힘을 말하지만 인간이 믿음의 힘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신자는 힘있고 강하신 분을 믿는 것이지 신자 스스로 힘을 얻어서 그 힘으로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아서 스스로 싸움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믿음의 힘이 없다고 느껴지면 낙심을 해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죄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지 은석교회의 전쟁도 아니고 여러분의 전쟁도 아닙니다.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자리하고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인간에게 힘을 줘서 싸우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싸움은 숫자와 숫자의 싸움입니다. 누가 더 많은가? 누가 더 큰가? 누가 더 높은가? 이것이 세상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는 이기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보다 많고 커지고 높아지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이 이기는 것이고 더 높아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싸움이고 사고방식이며, 가나안 역시 이러한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해변의 수다한 모래처럼 많은 군사와 병거를 앞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많고 더 큰가를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많고 더 크니까 우리가 이겼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나안을 철저히 전멸시키고 병거를 불사르고 말의 힘줄을 끊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싸움은 숫자의 싸움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힘의 싸움이 아니라 죄와의 싸움입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의와 죄의 싸움이 하나님의 전쟁이지 결코 숫자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숫자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아무리 많은 수의 교인이 있고 재정이 많고 거대한 예배당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의입니다.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온 의가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의를 만들어 내어서 죄와 싸워보겠다고 나서는 것 역시도 자기를 믿는 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자들은 자신의 윤리와 도덕을 힘으로 삼습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그것을 의로 내세워서 죄와 싸우며 살아가는 믿음이 있는 신자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죄가 되는 것은 내가 만들어 낸 의를 자신의 힘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있는 자인 것으로 행세를 함으로서 자기보다 못한 의를 소유한 자에 대해서는 무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는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자기의 힘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의가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발견한 이상 자신의 도덕과 윤리를 붙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에 군사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은 인간의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자랑하는 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아는 자로서 가나안 땅에 살아 갈 수 있는 이스라엘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병거와 말의 힘줄을 끊으라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는 분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세상의 힘을 모으고 커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이 의있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의와 죄의 싸움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에 도구로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전투에 도구로 제공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는 세상의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즉 숫자의 싸움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 교회가 더 교인수가 많느냐는 쓸데없는 싸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일년 재정이 얼마고 선교를 얼마나 하고, 이런 싸움은 인간의 싸움이고 경쟁일 뿐입니다. 누구 집이 더 큰가? 누가 차가 더 좋은가? 누구 아들이 더 공부를 잘하는가?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싸움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싸움이 아닌데 무엇 하러 그런데 관심을 둡니까?
가나안 족속이 왜 진멸을 당해야 합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이유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해서가 아니라 의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의인이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의인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생명은 의에 있는 것이지 절대로 세상의 힘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생명으로 삼아야 할 분이 누구입니까? 의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죄와 싸우신 것입니다. 총 칼을 빼들고 싸우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에 의해서 죽으신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세상이 무엇을 의지하는 가를 보이신 것입니다.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힘을 포기한 자로 오심으로서 죄가 무엇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 있는 자를 심판 당할 자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이것 하나는 명심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힘으로 사는 세상에 신자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합니까? 신자는 예수님과 일치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힘을 포기한 자로 등장하게 되고 약자로 등장을 하게 됩니다. 약자란 돈 없고 신체가 약하고 가진 것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을 믿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어느 것 하나도 자기를 구원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오로지 생명 되신 의만 의지하는 자가 바로 약자입니다. 가진 힘까지 포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 있는 증거입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가지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가지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힘이 되고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구들, 비싼 가전제품들, 수많은 것들이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고 힘이 되어주기 위해서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세상에서 통용될 뿐입니다. 비록 세상은 돈 많은 자를 우대하고 교인 수를 늘린 목사를 능력 있는 자로 여기지만 하나님이 시각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죄와 의의 기준에서 보실 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의있는 자가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세상에서 가치 있고 높임 받는 자라고 할지라도 의가 없으면 그는 악인이며 망할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 1:4-6절에 보면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악인입니다. 내가 곧 망하는 길에 서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신이 악인임을 압니다. 악인임을 알기에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 전혀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인이 착한 일을 한들 그것이 선이 될 수 없음을 압니다. 악인이 돈이 많아서 많은 돈을 교회에 바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의인이 될 수 없음을 압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의인될 수 없음을 알기에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의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를 신자로 의인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자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모인 교회는 힘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오로지 낮은 자, 약자만 보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