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1:16-20 은혜 받을 자

요 3: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라면 거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다른 구절은 외우지 못한다고 해도 이 구절만큼은 외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말씀인 반면에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요3:16절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셋째,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 3:16절의 말씀을 이 세 가지 안에서 이해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이 세상을 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그 사람을 멸망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말하면서 될수록 많은 사람을 교회로 오게 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구원 얻을 자가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무시하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실만한 능력이 없으시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분명 그 뜻을 스스로 이루시고도 남으실만한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굳이 인간의 전도 기술을 빌리지 않는다고 해도 능히 이루실만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구원 얻을 자가 구원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말인가를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우리가 전도하지 않음으로서 구원받지 못할 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자는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해버리면 결국 인간이 전도해야 할 이유와 목적과 명분이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로서 전도를 강조할 명분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은 곧 부흥에 크나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인해서 모순을 안고 있음을 알면서도 전도하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겠다는 의도보다는 교회에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심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 부흥에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성경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인간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을 자는 따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택한 자라고 말합니다. 엡 1:4절을 보면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란 택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즉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는 자는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3:16절에서 말하는 '세상'이나 '누구든지'라는 것은 세상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 5:21절에"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자기의 원하는 자가 따로 있음을 말씀합니다. 원하는 자를 예수님이 살리시는 것이지 우리가 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믿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 요 3:35-36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역시 누구나 믿으면 영생을 줄테니까 영생을 얻고 싶으면 믿으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택했다는 말씀과 어긋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문제를 우리 소관이 아니라 주님의 소관으로 생각하면 택한 자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믿게 하시고 순종하시는 것이 모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에게 만물을 주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는다, 순종한다, 영생을 얻는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택함 받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진 자라면 그는 곧 성공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을 인생의 최고의 성공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찾는 것이지 누구든지 교회로 끌어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택한 자만 듣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들었다고 해서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주어져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조차도 인간의 의지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을 받은 자만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이 제대로 증거 되어지는 현장에서는 깨닫는 자와 거부하는 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복음이 있는 자리에서는 누가 택한 자인가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자기를 보지 않고 교회도 보지 않고 복음만 전하는 사람으로 세워진 것이고 목사가 교인을 사랑하는 사랑은 오직 복음만 진실 되게 드러내는 것으로 증명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도 아무나 믿으면 구원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믿게 된 자만 영생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성경을 이렇게 복잡하게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까? 누가 보고 알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일부러 오해하고 착각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기록한 성경같이 보여집니다. 진짜 복음은 인간의 오해 뒤에 감추어져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성경을 보고 깨달아서 구원을 얻는 것을 거부하십니다. 만약 성경이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말씀으로 남겨졌다면 '택한 자'라는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아무나'가 중심이 되버릴 것입니다. 택한 자만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택한 자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말씀이라면 택한 자가 아닌 자들에게는 말씀은 언제나 걸림돌이요 장애물로 존재해야 당연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이 이해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해하고 말하는 신의 사랑은 차별이 없고 구별이 없는 사랑입니다. 모든 자를 사랑하시고 천국 보내시는 것이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에 대해서 세상은 귀를 막아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사실이고 영생에 대한 불변의 원칙이며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선택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18-20절에 "여호수아가 모든 왕과 싸운 지는 여러 날이라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가나안 거민들이 진멸을 당한 것을 그들의 죄의 결과로 생각을 합니다. 기브온 거민들처럼 이스라엘에게 항복을 하지 않고 자기 힘만 믿고 버텼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진멸을 당했다고 생각해 버리기 쉽습니다. 기브온 거민처럼 이스라엘에게 항복을 하면 되는데 왜 안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진멸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가나안이 항복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결과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 상식에 이해가 되어질 것입니다. 가나안을 진멸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라기보다는 그들의 행동의 결과라고 해야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 손상이 가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이 본문에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변호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은 가나안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는데 그들이 항복을 하지 않고 대적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진멸했다고 해버리면 모든 문제가 막힘이 없이 풀려갈 수 있을 것인데,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하는 인간을 곤혹스럽게 하고 난처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또 20절 하반절에 보면 "그들로 저주받은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진멸 당함은 가나안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온 것이 괘씸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이 강퍅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러 온 것이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면 결국 가나안이 이스라엘과 싸우게 된 그 책임은 여호와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싸우게 해놓고 진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횡포라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하나님의 횡포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사랑과 자비하심은 하나님의 자존심이고 또 교회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과 같은 부분은 인간의 상식에 이해가 되도록 합리화시킬 수 있는 말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할 수 있는 교회로 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다 인간 중심의 생각입니다. 이러한 인간 중심의 생각에서 '하나님은 나쁜 인간은 벌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착한 인간은 사랑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 착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도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반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인간이 착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반발하지 않는 인간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당장 오늘 본문을 대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가나안 사람을 이스라엘과 싸우게 해서 진멸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까? 세상을 보면 비참함에 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굶주림 속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누구나 혀를 찹니다. 그러면서 결국 하는 말은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왜 이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살게 하시느냐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반발입니다. 인간의 얄팍한 윤리와 도덕과 양심과 감정과 동정심까지 다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서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에 반발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세상의 누가 이해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은 착한 사람이 없고 모두가 진멸을 당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멸하실 자를 진멸하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가나안을 진멸을 하기 위해서 그들이 은혜를 입을 수 없도록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저주받은 자 되게 하셨다면,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결국 진멸에서 벗어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는 가나안이 은혜를 입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은혜를 입을 자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곧 택한 자입니다. 오직 택한 자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택함 받지 않은 자들은 은혜를 얻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롬 9:15-16절에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합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은혜를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애쓰고 열심을 낸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엡 2:8절에서도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인데, 은혜를 주는 자도 인간의 윤리나 도덕이나 양심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그러면 사람이 믿고 싶고 은혜를 받고 싶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반발을 합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원한다고 해도 받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그리스도를 믿고 싶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싶어하는 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이 가신 길을 나도 따라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신 길이 인생의 성공이 있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적으로 볼 때 실패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늘의 것만 소망하고 산다는 것을 반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 역시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는 자가 되게 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자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인데 누가 이 은혜를 사모하고 받고자 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직 택한 자만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받지 아니한 자가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싶고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성령 받지 않고서도 하나님을 믿고 싶어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세상의 상식과 맞는 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즉 인간을 복되게 해주고 착하게만 살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주고 열심을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내려주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러한 신을 찾고 있고 그러한 신을 믿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을 믿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지 않은 모든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모두가 진멸을 당해야 할 존재입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한 인간은 하나님의 세상을 망치고 더럽게 하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가나안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이스라엘과 싸우게 함으로서 그들을 진멸 시키는 모든 일은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겠다는 것은 이미 모세 때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앞에 가나안이 등장을 하고 그들을 진멸하게 됨으로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시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진멸하면서 우리 역시 진멸 당할 자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가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하셨는데 이스라엘이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도 역시 우리들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멸을 당해야 할 우리가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그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니까 받은 티를 내야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물론 은혜를 받았으면 그 표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에 대한 봉사나 열심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나는 주님의 은혜로 주를 믿게 되었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만 자랑하고 주님만 높이게 되는 것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애써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린 다만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만 높이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만 높인다는 것은 성령 받지 아니하면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자기 행위를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랑할만한 일을 내 해놓고도 그것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열심을 내고 봉사하는 것은 성령이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과 교회에 대한 일을 통해서 택한 자를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되어진 것, 그것은 주님만 높이는 것입니다. 그가 택한 자이고 이런 이유로 인생의 성공자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진 자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인생의 성공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오후예배

찬송 / 404 장

기도 / 한옥섭 집사

성경봉독 / 롬 9:1-3

설교 / 68강

고통 당하는 자

기도 / 설교자

찬송 / 278장

폐회 / 주기도문

하나님은 아무나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에 부자도 있게 하시고 열심히 봉사하는 자도 세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역시 교회에는 돈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해' '역시 교회는 열심 있는 사람이 많아야 부흥돼'라는 생각을 가짐으로서 성령을 받지 못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입을 조건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입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성령을 받은 자는 주님의 은혜만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의지하고 인간의 힘을 더 의지하는 강퍅한 마음을 성령이 다스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한 듯 했는데 돈 많은 사람을 다른 교회로 가게 하심으로서 결국 인간을 의지하는 모습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속에서도 하나님의 택한 자는 보석같이 빛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주님의 은혜만 자랑할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진멸을 당해야 마땅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믿음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 가장 귀하고 값진 선물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데 무엇이 또 부족합니까? 긍휼히 여김 받고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성공입니다